[朝鮮칼럼 The Column] 워라밸 망치는 反노동 정서
조선일보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입력 2020.07.25 03:20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2000년대 초 모 카드 회사가 사용했던 인기 광고 카피다. 평소에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휴가를 당당하게 즐기자는 취지였다. 이른바 '연차(年次)유급휴가권'은 노동운동의 최대 개가 중 하나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는 일과 삶의 균형, 곧 '워라밸'을 유별나게 강조하고 있다. 국내 휴가 여행을 독려하는 '근로자 휴가 지원사업'도 이 정부가 시작했다.
하지만 올여름 휴가 분위기는 풀이 죽어 있다. 휴가 계획을 짜느라 들뜬 모습이 주변에서 확연히 줄었고, 바캉스 관련 광고나 쇼핑 또한 예전만 못하다. 이맘때 출입국자 기록을 매년 경신하던 인천공항에는 한산한 기운마저 감돈다. 물론 일차적인 이유는 코로나19 사태다.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일과 휴식의 구분이 무너졌고, 개학과 방학 사이의 경계마저 깨졌다. 방역 체계 유지 및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휴가 기간 분산 캠페인도 시행 중이다.
그럼에도 코로나19가 휴가 문화 침체의 이유 전부는 아니다.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요인으로서 휴가의 대척 개념인 노동 현장이 무너지고 흔들리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나라에서 고용의 양과 질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현 정부 출범 이래 실업률은 줄곧 높아져 왔다. 특히 청년 체감실업률이 26.8%를 기록하고 있는 가운데 '일자리 대통령'은 고령자·단기·관제(官製)·알바 부문에서만 빛날 뿐이다. 일자리가 붙어 있다고 일거리가 넉넉한 것도 아니어서 휴가 기분 타령 자체에 눈치가 보인다. 강성 노조가 장악한 철밥통 정규직은 날마다 휴일일지 몰라도 대다수 자영업자나 불안정 노동자에게 휴가란 그림의 떡이다.
더 심각한 것은 반(反)노동 정서다. 문 대통령부터 일과 삶을 모순 관계로 이해한다. 올해 초 신임 공무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는 헌신과 희생을 주문하던 역대 대통령들과 달리 휴식과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당부했다. 월급이 자기 돈에서 나가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현재 집권 세력은 노동의 본질을 자기완성의 방해물 혹은 타인을 위한 사회적 강제로 인식하는 탁상(卓上) 이념의 포로다. 참고로 영국의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법정 근로 시간에 괘념치 않는다. 나랏일을 한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는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공하는 인생 대신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 제도나 현금 살포에서 행복을 찾는 시류가 확산하고 있다. 근로소득이 있는 가구 비율이 68.7%까지 감소한 가운데 근로소득세 한 푼도 내지 않는 사람이 전체 근로자의 40%에 이른다. 전체 가구의 절반이 현금 복지 지원을 받는데 그것의 종류만 2000개가 넘는다. 저소득층은 일해서 버는 돈보다 나라에서 받는 돈이 더 많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고 말하는 요즘 세태에 휴가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사는 것은 선대(先代)의 산업화 덕분이다. 동시에 그것은 유례없는 '근면 혁명'이었다. 이념은 사람을 게으르게 하지만 시장은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자유주의적 노동관이 출현한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본격 가동되면서부터다. 살기 위해 일하는 전근대적 생업(生業)에서 자발성과 자아실현,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근대적 직업(職業)으로 노동의 성격이 진보한 것이다. 1965년과 66년이 '일하는 해'와 '더 일하는 해'로 선포될 정도로 온 나라가 일에 대한 열정과 보람에 흠뻑 빠진 적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하지만 일이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뛰어난 성취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다르지 않다.
오늘날 우리는 일이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활력 상실의 나라,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의욕 실종의 나라가 되었다. 도처에 불로소득자, 무위도식자, 국고(國庫) 기생자, 무임승차자들이다. 길게는 지난 20여 년간의 좌파 시대정신, 짧게는 최근 3년간 현 정부의 산업 정책, 복지 정책, 고용 정책, 부동산 정책이 남긴 참담한 현실이다. 정직한 노동의 지엄함 과 숭고함을 외면하는 집권 세력이라 하는 일이라고는 나랏돈을 제 돈처럼 생색내며 쓰는 것뿐이다. '한국판 뉴딜 국민보고대회'와 같은 최근의 국정 홍보 퍼포먼스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진정한 일터와 일감은 수사(修辭)나 통계상(統計上)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 있어야 한다. 열심히 일하는 세상이 되어야 개인은 떳떳해지고 나라는 튼튼해지며, 휴가 또한 당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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