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스포츠 생중계가 사라졌다… 이 시기 버틸 희망이었는데
다큐멘터리의 재발견… 역시 야생동물만 한 게 없구나
곧 무관중 프로야구 개막, 응원가·야유 없는데 과연 볼만할까
코로나가 시작된 뒤 스포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게 됐다. 더 정확히는 스포츠 중계가 내 인생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깨달았다. 그런 면에서 내게 코로나 바이러스는 올해 3월 2일이 정점이었다. 배구 경기가 모두 중단된 날이다. 올 시즌 배구는 신천지 사태 이후 무관중으로 치러졌다. 관중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다. 관중의 소음이 빠지자 선수들 실력조차 확 떨어진 것 같았다. 블로커 두 명이 3m 가까이 솟아오르고 그 장벽을 피해 내리꽂은 공이 가파르게 코트 끝에 떨어졌을 때도 나의 몸에서 아드레날린은 분비되지 않았다. 어려운 수비를 해낸 뒤 득점에 성공하고도 선수들의 표정은 예전처럼 들떠 보이지 않았다. 배구가 바둑이 됐다. 그렇게 올해 프로 배구는 남녀 모두 우승팀 없이 끝났다.
평일 저녁 스포츠 생중계를 보는 것은 일상의 큰 기쁨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야구를 봤고 겨울에는 배구를 봤다. 축구도 보고 농구도 봤지만 응원하는 팀을 정해놓고 보는 프로 스포츠는 야구와 배구였다. 프로 당구 리그가 생겼을 때 나는 정말 기뻤다. 야구와 배구 말고도 볼 게 하나 더 생겼기 때문이었다. 짜장면 내기 당구는 단순한 놀이이지만 우승 상금 1억원이 걸린 당구는 스포츠다. 골프가 그렇듯이.
나는 스포츠 생중계로 코로나를 버티려 했고 그것은 짧은 생각이었다. 갑자기 모든 스포츠 생중계가 TV에서 사라졌다. 국내 스포츠가 먼저 사라졌고 유럽 스포츠와 미국 스포츠가 뒤를 이었다. 이제 어느 채널을 돌려도 스포츠 생중계를 해주는 데가 없다. 유럽의 자전거 레이스나 남미의 F1 경기도 끊겼다. 한 달 몇 만원씩 내고 셋톱박스를 설치한 건 스포츠 채널이 많기 때문이었는데, 그 모든 채널에서 추억의 명장면이나 국가대표 한일전, 2002년 월드컵 하이라이트를 틀고 있다. 국가대표 여자배구 명승부를 하기에 봤더니 김연경밖에 안 보였다. 생중계에서 김연경은 팀 전체를 끌어올리는 엔진이지만, 이미 이긴 걸 아는 경기에서 다시 보는 김연경은 박제된 스타였다. 그녀의 유니폼을 볼 때마다 왜 이름을 'YEON KOUNG'으로 썼을까 하는 비배구적 생각만 들었다.
스포츠 생중계가 없으니 다큐멘터리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사제 감옥에 갇힌 '올드보이' 주인공이 된 것처럼 다큐 채널들을 돌렸다. 인스턴트 커피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UFO는 왜 칠레 정글에 나타나는지, 말레이시아에서 호주로 가던 여객기는 왜 갑자기 수직으로 처박혔는지 같은 것들에 대해 알게 됐다. 스포츠 생중계만큼이나 흥미로운 다큐는 역시 야생동물을 다룬 것이었다. 사자·호랑이·표범·재규어·곰·하마·악어 같은 맹수부터 개미·벌·지네·모기·파리 같은 작은 생물들까지, 전문 채널들이 몇 년간 공들여 찍은 다큐멘터리가 주는 재미와 감동은 실로 기대 이상이었다.
어느 날 나는 자연 다큐멘터리의 비밀 하나를 알아냈다. 다큐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이전에 방영했던 비슷한 다큐에서 몇 장면을 떼어다 붙이기도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표범 A를 추적한 다큐에 얼마든지 표범 B나 C가 나올 수 있다. 물론 A의 특정 행동을 보여줄 땐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표범의 일반적 생태를 보여줄 땐 10년 전 찍은 B나 C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BBC 같은 다큐 전문 채널도 마찬가지였다.
자연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맹수에게 이름이 붙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보츠와나 초원을 제패한 수사자 세케카마, 인도 야생에서 11년을 여왕으로 군림하다가 송곳니가 빠지고 한쪽 눈이 먼 채 죽은 암호랑이 마츨리, 그리고 그를 왕국에서 쫓아낸 두 딸이 순다리와 크리슈나라는 것을 외우는 경지에 이르렀다. 진작 프로야구가 개막했더라면 세케카마도 마츨리도 몰랐을 것이다. 나는 사자와 호랑이가 물소를 사냥하려고 매복하는 걸 보는 대신, 시속 159㎞로 꽂히는 조상우의 투구와 역모션으로 땅볼을 잡아 1루로 뿌리는 김하성의 수비를 보며 저녁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좀 있으면 프로야구가 관중 없이 개막한다고 한다. 객석이 텅 빈 프로야구의 긴장이 예전과 같을까. 응원가가 들리지 않는 타석에 선 타자와 야유를 받지 않는 마운드의 투수 표정이 과연 볼만할 것인가. 이 모든 게 아무도 원치 않는 생중계가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여,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생중계를 제발 그만 멈추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