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동서남북] 빌리 홀리데이와 조두순

최만섭 2017. 11. 22. 06:54

[동서남북] 빌리 홀리데이와 조두순

아동 성폭력 가중처벌한다더니 집행유예가 10명 중 4명꼴
법이 피해 아동을 보호 못 하니 시민들 청원으로 항의하는 것

김윤덕 문화부 차장
김윤덕 문화부 차장

전설의 재즈 보컬 빌리 홀리데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열세 살, 아버지는 열여섯 살이었다. 지독히 가난했고, 그마저도 아버지는 모녀를 버리고 도망갔다. 허드렛일 하러 가던 집 백인 남성에게 성폭행당한 건 겨우 열 살 때다.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은 오히려 "네가 유혹했지?" 추궁하며 흑인 소녀를 감화원에 보냈다. 삶의 희망을 잃은 빌리는 뉴욕 뒷골목을 헤매며 몸을 팔았고, 최고의 재즈 가수로 각광 받을 때에도 온몸에 각인된 성적 학대, 그 트라우마를 씻지 못한 채 마흔네 살에 약물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 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50만명에 이른다는 소식에 빌리 홀리데이 얘기가 나온 건, 그가 살았던 20세기 초반이나 100년이 지난 지금의 아동 성폭력 실상이 별반 다를 것 없다는 회의 때문이다. 2006년 '용산 초등생 성폭행 살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 사회는 분노로 들끓었다. 전자 발찌, 신상 공개 등 온갖 법과 제도가 앞다퉈 마련됐다. 하지만 예방은커녕 아동 성범죄는 해마다 늘고, 나주 성폭력 사건, 조두순 사건, 이영학 사건, 용인 여중생 사건에서 보듯 수법은 더욱 잔인해지고 있다.

얼마 전 신의진, 서영교 전·현직 여야 여성 의원이 의기투합해 마련한 국회 세미나에선 아동 성폭력 실상과 제도의 허점이 낱낱이 드러났다. 아동 성폭력이 해마다 1000건씩 신고되고, 그중 절반 이상이 친족 또는 아는 사람이 저지른 성폭력이다. 아동 성범죄는 가중처벌해야 한다며 특례법까지 만들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가해자가 10명 중 4명이란다. 친족에게 성폭력을 당한 아동은 가해자가 한 식구란 이유로 나라의 구조금조차 받지 못한다. 피해 어린이의 인권과 사후 치료도 엉성하다. 해바라기아동센터가 전국에 37곳 있지만 의료진과 심리 치료사를 제대로 갖춘 곳은 3곳에 불과하다. 장형윤 아주대 의대 교수는 "피해 어린이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의학적 진단은 우울, 불안, 자해, 자살 시도 등 평균 세 가지 이상인데 제대로 된 치료 없이 방치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역설적이게도, 판사들의 가부장적 인식과 무지는 성범죄 해결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조두순만 해도 검찰은 무기징역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음주에 의한 심신 미약'이란 이유로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여중생을 임신시켜 징역 9년을 선고받은 40대 연예 기획사 대표를 최근 대법원은 "사랑이었다"며 무죄 확정했다. 피해자 길들이기, 일명 '그루밍'이란 수법이 아동 성범죄에서 얼마나 흔히 저질러지는지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부르짖은 사법 개혁의 본뜻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인권을 중시하는 판결, 마초 판사들의 편견과 몰상식부터 바꿔나가는 것이 개혁의 첫걸음이다.

조두순의 희생양이었던 나영이(가명)는 다행히 잘 자랐다고 한다. 부모와 의료진, 전문 상담가들의 협력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대학 입시를 눈앞에 두고 있다. 물론 나영이는 특수한 경우다. 피해 아동 대부분은 법과 제도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 또 다른 공포에 떨고 있다.

부모들은 내 아이가 그저 악마의 사정거리에 들어가지 않기를 정화수 떠놓고 매일 밤 비는 수밖에 없다. '친절한 아저씨일수록 조심하라'는 충고도 잊지 않아야 한다. 중국, 이란처럼 아동 성범죄자는 무조건 공개 처형하라는 게 아니다. 피해 아동의 인권과 미래를 최우선에 두고 판결해달라는 것뿐이다. 아동 성범죄자
는 집행유예를 원천 배제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 음주 상태에서 저지른 성범죄라면 가중처벌해야 하는 건 상식 아닌가? 3년 뒤면 만기 출소하는 조두순이 나영이가 사는 동네로 돌아가더라도 현행법상 막을 방법이 없다고 한다. 가능성 제로인 줄 알면서도 사그라들 줄 모르는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 운동은 이 어처구니없는 사회를 향한 시민들의 분노와 절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21/201711210331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