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민박집
이생진
바닷가 민박집 여기다 배낭을 내려놓고 라면 상자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커피 한잔 옆에 놨다 오른 쪽 창문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바다가 보이면 됐어’ 이건 거창하게도 내 인생 철학이다 철학이 없어도 되는데 80이 넘도록 철학도 없이 산다고 할까 봐 체면상 내건 현수막이다
‘바다가 보이면 됐어’ 인사동에 모인 젊은 친구들이 낙원호프집에서 부르는 구호도 이거다 그런데 이 민박집에서는 진짜 바다가 보인다 그래서 나는 호프집보다 이 민박집이 좋다
바다는 누가 보든 말든 제 열정에 취해 여기까지 뛰어든다 그 모습이 나만 보고 달려오는 것 같아 반갑다 다시 돌아갈 때는 모든 이별을 한꺼번에 당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 바다가 창 밖에 있으니 보호자 옆에 있는 것 같아 든든하다 ☆★☆★☆★☆★☆★☆★☆★☆★☆★☆★☆★☆★ 가출기(家出記)
이생진
배낭 하나 메고 나왔다는 거 그리고 낯선 타향이라는 거 여관방에 머물며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궁색을 떨지만 그래도 그것이 내겐 값비싼 자유라는 거 피 흘려 얻은 것은 아니지만 자유는 소중하다 아껴 써야 한다 자유도 소모품이니까 밤늦게 창문을 열어 바다의 비밀을 볼 수 있고 나간다는 말 없이 나갈 수 있고 라면을 끓이든 누룽지를 끓이든 상관없고 어디로 가든 간섭이 없는 자유 세수를 하든 면도를 하든 세수를 않든 면도를 않든 거지같이 싸매고 다녀도 아무도 말하지 않는 그런 값진 자유를 배낭 하나로 얻었다는 거 노숙 직전이지만 그것도 쟁취다 ☆★☆★☆★☆★☆★☆★☆★☆★☆★☆★☆★☆★ 가파도 아줌마
이생진
가파도 민박집 아줌마가 먼저 말했다 "하나도 늙지 않았네요 10년 전 그대로..."
나도 따라 말했다 "아줌마도 10년 전 그대로네 미역국도 그대로고 콩장도 그때 그 맛 그대로네"
그럼 그 사이 그 10년은 어디서 뭘 했단 말인가 참 이상하네 ☆★☆★☆★☆★☆★☆★☆★☆★☆★☆★☆★☆★ 갈매기가 일제히
이생진
갈매기가 모두 '모두'라는 말보다 '일제히'라는 말이 어울리네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일제히 침묵을 입에 물고 일제히 날아갈 태세로 너무나 일제히
그것 때문에 얼마나 피곤한가 나는 자유 때문에 쓸쓸한 놈 나는 혼자서 갈매기를 보고 갈매기는 일제히 나를 의심하네 ☆★☆★☆★☆★☆★☆★☆★☆★☆★☆★☆★☆★ 고독과 고독 사이
이생진
태종대 아찔한 이마 위에서 마주보이는 섬
생도*
말 없는 고독 과 고독 사이
잠시 후 문자가 ‘여기서도 네가 보인다’ 고 콕콕 찌른다 ☆★☆★☆★☆★☆★☆★☆★☆★☆★☆★☆★☆★ 구인사
이생진
- 꿀벌
구인사(구인사) 깊은 계곡 불전 앞 자판기 두 대 커피에 맛들인 꿀벌들 가을엔 코스모스 들국화도 많은데 종이컵을 따라다니며 구걸하는 꿀벌들 수려한 산중에서 꽃에 핀 꿀을 따지 않고 종이컵에 묻은 설탕을 핥는 벌 꽃이 싫어진 것일까 아니면 타락한 것일까 웬지 내가 부끄러워지네 ☆★☆★☆★☆★☆★☆★☆★☆★☆★☆★☆★☆★ 그리운 바다 성산포 1
이생진
아침 여섯시 어느 동쪽에도 그만한 태양은 솟는 법인데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다고 부산필거야
아침 여섯시 태양은 수 만 개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와서 해를 보라~하나밖에 없다고 착각해 온 해를 보라
성산포에서는 푸른색 이외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성산포에서는 설사 색맹일지라도 바다를 빨갛게 칠할 순 없다
성산포에서는 바람이 심한 날 제비처럼사투리로 말한다 그러다가도 해뜨는 아침이면 말보다 더 쉬운 감탄사를 쓴다 손을 대면 화끈 달아오르는 감탄사를 쓴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말만 하고 바다는 제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약하다
맨 먼저 나는 수평선에 눈을 베었다 그리고 워럭 달려든 파도에 귀를 찢기고 그래도 할말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저 바다만의 세상 하면서 당하고 있었다 내 눈이 그렇게 유쾌하게 베인 적은 없었다 내 귀가 그렇게 유쾌하게 찢긴 적은 없었다
모두 막혀 버렸구나 산은 물이라 막고 물은 산이라 막고 보고 싶은 것이 보이지 않을 때는 차라리 눈을 감자 눈을 감으면 보일거다 떠나간 사람이 와있는 것처럼 보일거다 알몸으로도 세월에 타지 않는 바다처럼 보일거다 밤으로도 지울 수 없는 그림자로 태어나 바다로도 닳지 않는 진주로 살거다 ☆★☆★☆★☆★☆★☆★☆★☆★☆★☆★☆★☆★ 그리운 바다 성산포 2
이생진
일출봉에 올라 해를 본다 아무생각 없이 해를 본다 해도그렇게 나를 보다가 바다에 눕는다 일출봉에서 해를 보고나니 달이 오른다 달도 그렇게 날 보더니 바다에 눕는다 해도 달도 바다에 눕고나니 밤이된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바다에 누어서 밤이 되어 버린다
날짐승도 혼자 살면 외로운 것 바다도 혼자 살기 싫어 퍽퍽 넘어지며 운다 큰산이 밤이 싫어 산짐승 불러오듯 넓은 바다도 밤이 싫어 이부자리를 차내버린다 사슴이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밤을 피해가듯 넓은 바다도 물속으로 물속으로 밤을 피해간다
성산포에서는 그 풍요 속에서도 갈증이 인다 바다 한가운데에 풍덩 생명을 빠뜨릴 순 있어도 한 모금 물을 건질 순 없다 성산포에서는 그릇에 담을 수 없는 바다가 사방에 흩어져 산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은 가장 죽기도 좋은 곳 성산포에서는 생과 사가 손을 놓치 않아 서로 떨어질 수 없다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의 넋 파도는 살아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새워할 것도 없이 돌아선다 사슴이여 살아있는 사슴이여 지금 사슴으로 살아 있는 사슴이여 저기 저 파도는 사슴 같은데 산을 떠나 매 맞는 것 저기 저 파도는 꽃 같은데 꽃밭을 떠나 시드는 것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에 넋 파도는 살아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새움도 없이 말하지 않지만 ☆★☆★☆★☆★☆★☆★☆★☆★☆★☆★☆★☆★ 그리운 바다 성산포 3
이생진
어망에 끼었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 수문에 갇혔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갈매기가 물었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하루살이 하루 산 몫의 바다도 빠져나와 한 자리에 모인 살결이 희다 이제 다시 돌아갈 곳도 없는 자리 그대로 천년만년 길어서 싫다
꽃이 사람된다면 바다는 서슴지 않고 물을 버리겠지 물고기가 숲에 살고 산토끼도 물에 살고 싶다면 가죽을 훌훌 벗고 물에 뛰어들겠지 그런데 태어난 대로 태어난 자리에서 산신에 빌다가 세월에 가고 수신께 빌다가 세월에 간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는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저 세상에 가서도 바다에 가자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자 ☆★☆★☆★☆★☆★☆★☆★☆★☆★☆★☆★☆★ 그리운 바다 성산포 4
이생진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나는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 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를 보고있는 고립 성산포에서는 주인을 모르겠다 바다 이외의 주인을 모르겠다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집 개는 하품이 잦아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게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무더웠던 사람 죽어서 시원하라고 산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놔 두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 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평생 두고 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 그리운 바다 성산포 5
이생진
일어설 듯 일어설 듯 쓰러지는 너의 패배 발목이 시긴 하지만 평면을 깨뜨리지 않는 승리 그래서 네 속은 하늘이 들어앉아도 차지 않는다 투항하라 그러면 승리하리라 아니면 일제히 패배하라 그러면 잔잔하리라 그 넓은 아우성으로 눈물을 닦는 기쁨 투항하라 그러면 승리하리라 성산포에는 살림을 바다가 맡아서 한다 교육도 종교도 판단도 이해도 성산포에서는 바다의 횡포를 막는 일 그것으로 독이 닳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절망을 만들고 바다는 절망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오늘 아침 하늘은 기지갤 펴고 바다는 거울을 닦는다 오늘 낮 하늘은 낮잠을 자고 바다는 손뼉을 친다 오늘 저녁 하늘은 불을 켜고 바다는 이불을 편다 바다가 산허리에 몸을 굽힌다 산은 푸른 치마를 걷어올리며 발을 뻗는다 일체에 따듯한 햇살 사람들이 없어서 산은 산끼리 물은 물끼리 욕정에 젖어서 서로 몸을 부빈다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칼이다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양이다 그릇 밖에서 출렁이는 서글픈 아우성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갈증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짐승이 짐승보다 산이 산보다 바다가 더 높은 데서 더 깊은 데서 더 여유 있게 산다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평생 보고만 사는 내 주제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 하늘이여 바다 앞에서 너를 쳐다보지 않는 것을 용서하라 하늘이여 바다는 살았다고 하고 너는 죽었다고 하는 것을 용서하라 너의 패배한 얼굴은 바다 속에서 더 아름답게 건져내는 것을 용서하라 그 오만한 바다가 널 뜯어먹지 않고 그대로 살려준 것을 보면 너도 바다의 승리를 기뻐하리라.. 하늘이여 내가 너를 바다 속에서 너를 보는 것을 용서하라. ☆★☆★☆★☆★☆★☆★☆★☆★☆★☆★☆★☆★ 그만 살아야지
이생진
이젠 그만 살아야지 하다가도 시가 바람을 일으키면 벌떡 일어나 시를 쓴다 그것 때문에 그럭저럭 80을 넘겼다 내가 생각해도 그리 미운 짓은 아니다 오늘은 아예 옛날처럼 배낭을 메고 멀리 섬으로 간다고 나섰다 목포 앞바다 여객선터미널에서 뱃시간을 챙기는 나 그것 이상의 것이 없다
☆★☆★☆★☆★☆★☆★☆★☆★☆★☆★☆★☆★ 까치와 까마귀가
이생진 먼저 까치가 짖더니 뒤 이어 까마귀가 짖는다 여러 마리가 연달아 짖는다 백와 흑의 파로워(follower)들이다 그 소리를 검색해보니 공갈과 협박 내가 떠돌며 쓴 시가 모두 가짜란다 가짜라는 뜻이나 알고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오늘은 이상하게 까치와 까마귀에게 당하는 기분이다
걸어온 길이 겨우 1km가 채 안 되는 짙은 안개 속 은행나무는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털어버리고 겨울에 덮을 나뭇잎 하나 가진 것이 없다 900년을 살아온 은행나무도 저렇게 빈손으로 서 있는데 까치와 까마귀가 나를 향해 거침 없이 짖는 소리는 떠돌며 쓴 시가 모두 가짜라는 것이다 오늘은 이상하게 그런 기분이다
그들이 뒤따라오며 내 행동을 지켜본 듯이 나를 파헤친다 까치는 찢어발기는 소리이고 까마귀는 둔기로 내리치는 소리다 그래서 나도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놈들아 시에 진짜가 어디 있니 입이나 다물어라” 그러고는 얼른 ‘건방진 것들’ 하고 웃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까치와 까마귀가 나를 물고 늘어지는 기분이다 ☆★☆★☆★☆★☆★☆★☆★☆★☆★☆★☆★☆★ 바다의 오후
이생진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 꿈
이생진
이 세상에 없는 여자를 꿈에서 안아 보고 기뻐했다 꿈이 시키는 대로 간음하다가 사람에게 들키고는 밤새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들었는데 날이 새어 꿈임을 알고 안심했으나 그녀가 없는 세상임을 알고는 다시 실망했다 ☆★☆★☆★☆★☆★☆★☆★☆★☆★☆★☆★☆★ 나만 남았다
이생진
다시 나만 남았다 영혼을 쫓아다니느라 땀이 흘렀다 영혼을 쫓아다니는데 옷이 찢겼다 자꾸 외로워지는 산길 염소쯤이야 하고 쫓아갔는데 염소가 간 길은 없어지고 나만 남았다
곳곳에 나만 남았다 허수아비가 된 나도 있었고 돌무덤이 된 나도 있었고 나무뿌리로 박힌 나도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내가 많아도 나는 외로웠다 ☆★☆★☆★☆★☆★☆★☆★☆★☆★☆★☆★☆★ 낙엽
이생진
한 장의 지폐보다 한 장의 낙엽이 아까울 때가 있다 그때가 좋은 때다 그때가 때묻지 않은 때다 낙엽은 울고 싶어하는 것을 울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기억하고 싶어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편지에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엽을 간직하는 사람은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 새로운 낙엽을 집을 줄 아는 사람은 기억을 새롭게 갖고 싶은 사람이다 ☆★☆★☆★☆★☆★☆★☆★☆★☆★☆★☆★☆★ 낚시꾼과 시인
이생진
그들은 만재도에 와서 재미를 못 보았다고 한다 낚싯대와 얼음통을 지고 배를 타기 직전까지도 그 말만 되풀이했다. 날보고 재미 봤냐고 묻기에 나는 낚시꾼이 아니고 시인이라고 ?더니 시는 어디에서 잘 잡히느냐고 물었다 등대 쪽이라고 했더니 머리를 끄덕이며 그리로 갔다 ☆★☆★☆★☆★☆★☆★☆★☆★☆★☆★☆★☆★ 내가 백석이 되어
이생진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 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갈 수 있다는 신비한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젋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전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갔다 눈오는 날 재로 뿌려달라던 흰 유언을 밟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티나무 밑은 대낯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만의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죽어서 만나는 설움이 무슨 기쁨이냐고 울었다 한참 울다보니 그것은 장발이 그려놓고 간 그녀의 스무 살 때 치마였다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려놓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 들어갔다는 말을 못했다 ☆★☆★☆★☆★☆★☆★☆★☆★☆★☆★☆★☆★ 내일은 비
- 청개구리
이생진
<내일은 비> 오랜 가뭄 끝에 청개구리가 뽕나무를 올라간다 가장 믿음직한 소리로 <내일은 비> 스무 개의 알덩어리를 나무 밑에 묻어 놓고 근심하던 끝에 비 올 거라며 터뜨리는 울음소리 그 슬픈 소리가 이상하게도 믿음직하다
<내일은 비> 우산을 준비해야지 밤 아홉시 뉴스 시간에도 TV는 기상도를 그려가며 내일은 비라고 했지만 청개구리가 울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나는 TV보다 청개구리를 믿는다
청개구리는 그 한 마디를 위해 살고 있는 착한 시인 <내일은 비> ☆★☆★☆★☆★☆★☆★☆★☆★☆★☆★☆★☆★ 너무 많은 행복
이생진
행복이 너무 많아서 겁이 난다 사랑하는 동안 행복이 폭설처럼 쏟아져서 겁이 난다
강둑이 무너지고 물길이 하늘 끝닿은 홍수 속에서도 우리만 햇빛을 얻어 겁이 난다
겉으로 보아서는 아무 것도 없는 너와 난데 사랑하는 동안에는 행복이 너무 많아 겁이 난다 ☆★☆★☆★☆★☆★☆★☆★☆★☆★☆★☆★☆★ 달 보는 시인
이생진
-만제도 79
수근거린다 "그 사람은 시인이라 하던데" 하루는 장바위산 꼭대기에 올라가 국도(菊島) 저 너머 수평선을 보고 하루는 물생산 꼭대기에 올라가 염소랑 바다를 보는데 염소 같더라구 하루는 풀숲을 헤치고 등대에 올라가 등대 밑에서 바다를 보는데 등대 같더라구 밤엔 선착장에 나와 땅바닥에 누워 별을 보는데 별 같더라구 혹시 사별한 사람 아닌가 혹시 짤린 사람 아닌가 혹시 자살 기도하는 사람 아닌가 하고 마을 사람들은 이상히 여겨 목사님께 물어 봤대나 그랬더니 목사님 말이 "시인이란 시래기 같은 사람이지만 눈 하나는 수정같이 맑다"고 다음 날 마을 여자들은 시인의 눈을 보려고 물 길러 가서 마주친 시인의 눈을 보다가 물을 엎질렀대나 ☆★☆★☆★☆★☆★☆★☆★☆★☆★☆★☆★☆★ 무명도
이생진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 바다를 본다
이생진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성산포에서는 한 마리의 소도 빼놓지 않고 바다를 본다 한 마리의 들쥐가 구멍을 빠져나와 다시 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바다를 본다 평생 보고만 사는 내 주제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 ☆★☆★☆★☆★☆★☆★☆★☆★☆★☆★☆★☆★ 바다의 오후
이생진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 벌레 먹은 나무잎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 복사꽃
이생진
나는 가끔 오래된 혼백과 이야기하는 수가 있다 북한산 유일한 복사꽃 나무 밑에서처럼
"매월당 김시습이 다녀갔을까" "다녀갔겠지 언제고 나보다 한 걸음 먼저 왔다 가는 사람이니까 다녀갔겠지"
복사꽃이 기절한다 이걸 못보고 봄이 왔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매월당 김시습이 세 살 때부터 좋아하던 꽃 죽어서도 사월엔 복사꽃을 찾겠지 ☆★☆★☆★☆★☆★☆★☆★☆★☆★☆★☆★☆★ 설교하는 바다
이생진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 섬으로 가는 자유인
이생진
배 위에서 구두끈을 매는 여인은 아름답다 내가 배를 타고 떠도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배 위에서 배낭을 메고 귀로 파도소리 들으며 눈으로 먼 섬을 가리키는 여인은 아름답다 그런 낭만은 어디서 배웠을까 학교 선생님이 가르쳐 줬다고 하면 그건 명교사다 빈집 문은 어떻게 잠그고 왔을까 요즘 도둑이 심하다든데 파도소리에 맞춰 콧노래 부르며 먼 섬으로 가고 있는 여인은 아름답다 여자여서 그럴까 아니 남자라도 그런 남자는 세상을 살 줄 아는 남자다 사람들은 갈 데가 없어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살 줄 몰라서 방황하는 것인데 저렇게 떠돌아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정말 자유를 누릴 만한 사람이다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할까 우리만의 애국가를 부르고 싶다 ☆★☆★☆★☆★☆★☆★☆★☆★☆★☆★☆★☆★ 세상이란 것
이생진
가만히 앉았는데 세상이란 것이 떠오른다 지구의로 보면 둥글고 정치로 보면 쑥밭이고 역사로 보면 불쌍하고 나를 보면 벌레 먹은 잎새 같다 나를 왜 평가절하하느냐 조금 동정받는 것이 사랑받는 듯해서 어떤 땐 사랑에 굶주린 늑대 같아서 ☆★☆★☆★☆★☆★☆★☆★☆★☆★☆★☆★☆★ 어떤 여자와 나
이생진
어떤 여자는 나이 들면서 하고 싶은 일이 문경새재 넘어가기 전 언덕에 암자를 짓고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이라고 나는 깊은 섬에 들어가 바닷가를 돌며 시를 낭송하는 것이고 그녀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이다 그리고 나는 이 섬 저 섬 옮겨 다니며 뻥뻥 헛소리만 치는데 암자로 들어간 여자는 꼭 금강경에서 나오는 소리만 토한다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이이지만 나를 만나고 간 어느 젊은이가 문경새재 소식을 봄소식처럼 전하고 갔다 이 젊은이가 내 소식을 문경새재에 전했는지 모르겠다 어떤 여자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 우정
이생진
도시 한복판에서 혼자 사는 어부를 생각하는 것은 생각부터가 쓸쓸하다 홍어잡이 배에서 젊은 팔을 잃은 윤씨 이번엔 팔이 되어준 아내를 잃었으니 뭐라고 말해야 위로가 될지 그래도 나보고 만재도*에 오라한다 한 손으로 마늘을 깔 수 있으니 김치를 담글 수 있고 통발을 바다에 던졌으니 우럭은 들어있을 거고 당신이 좋아한느 별은 밤새 봐도 닳지 않으니 만재도에 오라 한다
인사동 커다란 유리에 비친 윤씨의 얼굴 내가 가면 그의 아내처럼 커피잔을 들고 나오겠지 통발을 끌어올려 우럭을 꺼내던 손 배에서 내리자 마자 그 손이 나를 끌어안는다
그의 손과 나의 손 손끼리 통하는 말 그건 언어가 아니라 끈끈한 점액이다 ☆★☆★☆★☆★☆★☆★☆★☆★☆★☆★☆★☆★ 우체국 아가씨
이생진
우체국 가면서 생각했다 꼭 연인네 가는 것 같다고 가다가 개울을 건너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를 꺼내 마시며 생각했다 꼭 연인네 집 앞에 온 것 같다고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난롯가에 앉았던 아가씨가 일어서서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냐고 묻지도 않고 일부인을 꽝꽝 내리친다 봉투가 으스러져 속살이 멍드는 줄도 모르고 꽉꽉 내리칠 때 내 손가락이 바르르 떨었다 ☆★☆★☆★☆★☆★☆★☆★☆★☆★☆★☆★☆★ 지팡이와 할머니
이생진
- 소모도에서
소모도 언덕길을 올라가는 검은 지팡이와 하얀 할머니
지팡이는 할머니를 만난 지 3년 됐고 할머니는 지팡이 없이 80년을 지내다가 지팡이를 만난 후부터는 지팡이 없이 하루도 지내지 못한다
할머니는 나를 보느라 지팡이를 세워놨는데 지팡이는 나를 보지 않는다 할머니는 나를 보겠다고 허리를 펴는데 지팡이만큼 펴지지 않는다 지팡이는 허리를 굽히지 못하고 할머니는 허리를 펴지 못하고 지팡이는 할머니 없이 걷지 못하고 할머니는 지팡이 없이 걷지 못하고 이렇게 못하는 것끼리 만나 못하는 일 없이 사는구나 ☆★☆★☆★☆★☆★☆★☆★☆★☆★☆★☆★☆★ 추억
이생진
한여름 땀을 씻으며 일출봉에 올라가 풀 위에 누웠는데 햇빛이 벌떼처럼 쏟아지더군 여기서 누굴 만날까 장미같은 여인인가 가시 찔린 여인인가 그런 것 다 코웃음 치다가 내려오는데 신혼여행으로 온 한 쌍의 부부 셔터를 눌러달라고 하더군 그 사람들 지금쯤 일남일녀 두었을 거다 그 사진은 사진첩에 묻어두고 이혼할 때쯤 되었을거다 이혼하거든 여기서 바다랑 살지 이혼하거든 여기서 돌이랑 살지 이혼하거든 여기서 추억이랑 살지 ☆★☆★☆★☆★☆★☆★☆★☆★☆★☆★☆★☆★ 추포도 소금꽃
이생진
염전에서 소금물 받아먹고 사는 함초鹹草 짜다고 찌푸리는 일이 없다 심해숙沈海淑씨도 함초 같다 이름 석자가 모두 삼수변이라며 바다와의 인연을 자랑하는 여자 육지에서 시집와 얻은 벼슬 부지런한 여리장女里長 깊은 바다 맑은 물 심해숙深海淑 추포염전 김대식씨 부인 사내는 고무래를 밀고 여자는 소금차를 밀고 창고에서 흘러나오는 ‘목포의 눈물*’은 그래서 짜다 염도 2도의 바닷물을 폭염에 구워 25도의 해수에서 피는 하얀 소금꽃 소금꽃이 필 때마다 김씨 부부는 얼굴이 환하다 암태도에서 또 작은 섬 추포도로 들어와 천일염 만들기 30여 년 아내를 강원도 삼척에서 추포도까지 데려오는데 김씨는 섬이라는 말을 숨겼다는 소문 그래서 속은 것 같다는 뒷이야기 속아 사는 여자가 어디 한둘인가 오늘도 저문 하루 백설 같은 소금을 거둬 창고에 밀어 넣는 ‘목포의 눈물’ 그래서 눈물은 짜다
*이난영이 부른 노래 ☆★☆★☆★☆★☆★☆★☆★☆★☆★☆★☆★☆★ 편지 쓰는 일
이생진
시보다 더 곱게 써야 하는 편지 시계바늘이 자정을 넘어서면서 네 살에 파고드는 글 정말 한 사람만 위한 글 귀뚜라미처럼 혼자 울다 펜을 놓는 글 받는 사람도 그렇게 혼자 읽다 날이 새는 글 그것 때문에 시는 덩달아 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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