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6.29 03:12
단편 중심인 한국 소설에 '손바닥 소설' 掌篇 활기… 성석제·이기호 등 잇단 발표
성석제 4쪽 소설 읽어보니 허구를 통해 진실 탐색하는 스토리텔링의 본질 드러내
![박해현 문학전문기자](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706/28/2017062803299_0.jpg)
한국 소설의 중심은 여전히 200자 원고지 100장 안팎의 단편이다. 그러나 더 짧은 장편(掌篇)을 쓰는 작가들도 늘어나고 있다. '손바닥 소설'이라고도 불린다. 예전에 콩트라고 했던 장르다. 어쩐지 콩트는 죽은 말이 된 듯하다. 콩트라고 하면 소설 유사품이라고 여기는 문단 풍토 때문이다. 1930년대 조선의 신문 잡지에서 콩트가 유행하자 소설가 박태원은 "편편한 소품(小品) 때문에 단편소설을 발표할 지면을 빼앗긴다"고 푸념했다. 여전히 콩트는 작가의 여기(餘技)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요즘엔 콩트 대신 '짧은 소설'이거나 그냥 소설이라고 부른다. 성석제의 소설집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을 비롯한 3권의 짧은 소설이나 이기호의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와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가 요즘 잘 읽히는 소설책으로 꼽힌다. 소설의 경박단소(輕薄短小) 현상이다. 그 이유 역시 간단하게 설명된다. 단문으로 소통하는 소셜 미디어 시대에 발 빠르게 적응하려는 소설의 진화 방식이라는 것. 물론 아직 본격 소설이 서사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다. 다만 소설의 경량화는 허구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성석제의 4쪽짜리 소설 '이 또한 흘러가리라'를 요약해서 스토리텔링의 원리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캐나다에 이민을 간 한국인 세 명의 이야기다. 영어 실력이 각각 상·중·하 수준이다. '상'에 해당하는 한국인은 캐나다의 깊은 산마다 설치된 '곰 경고문'을 풀이한다. 곰을 만나거든 이러저러한 대처법이 있다고 한다. 그래도 곰을 피하지 못할 경우엔? 경고문은 '싸워라'고 한다. 도대체 말이 되는가. 그러나 똑똑한 교민은 그 이유를 풀이한다. '사람이 곰과 싸워야 곰이 다음부터는 사람을 괴롭히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것. 말이 되나?
![칼럼 관련 일러스트](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706/28/2017062803299_1.jpg)
영어 실력 '하'인 사람은 이민 이후에도 영어를 습득하지 못한 어르신이다. 그는 봄철엔 캐나다의 산 곳곳에 널린 고사리 풀을 뜯어 집에 갖고 왔다. 어느 날 그가 풀을 한보따리 들고 산을 내려가자 산림 공무원이 제지했다. "그 많은 풀을 왜 뽑아 가는가"는 질문은 다행히 알아들었지만 영어로 대답하자니 요령부득이었다. 그러나 '고심하다가 집에서 토끼에게 줄 거라는 대답을 간신히 찾아냈다'는 것. 그는 양손을 귀에 대고 껑충껑충 뛰었다. 그제야 산림 공무원은 웃으며 보내줬다고 한다. 임기응변의 지혜를 가르친 우화로 읽힌다.
이 짧은 소설엔 긴 이야기가 들어 있다. 영어 실력 '상'은 문자 해독을 할 줄 알기에 문장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려고 한다. 경전(經典)을 세상의 척도로 삼았던 근세 이전의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경고문 '곰과 싸워라'를 해석한 방식은 생뚱맞다.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복잡하게 생각할 줄 알지만 논리를 위한 논리의 맹점에 빠진 꼴이다.
영어 실력 '중'은 '사슴'이란 단어가 떠오르지 않자 사슴 '루돌프' 전설을 기억해냈다.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까닭을 보여준다. 실체(사슴)가 아니라 상징(루돌프)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시적(詩的)이기도 하다. 문학의 기초는 시학(詩學)이니까.
영어 실력 '하'는 논리적 분석이나 보편적인 서사를 활용할 줄 모른다. 하지만 직감(直感)은 있다. 그것을 가장 경제적인 언어, 몸짓으로 표현했다. 장편(掌篇)이 장편(長篇)보다 더 효과적인 서사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런데 작가는 왜 '집에서 토끼에게 줄 거라는 대답을 찾아냈다'고 썼을까. '집에서 기르는 토끼가 생각났다'고 쓰지 않고서.
아마 그 이야기 속의 어르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