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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윤의 맛 세상] 땀 흘리며 비운 민어탕 한 그릇… 온몸엔 시원함이

최만섭 2017. 8. 3. 08:59

[김성윤의 맛 세상] 땀 흘리며 비운 민어탕 한 그릇… 온몸엔 시원함이

입력 : 2017.08.03 03:08

여름이 제철인 민어 커야 제맛… 뱃살은 기름지고 등살은 담백
대가리와 뼈 온 종일 끓여서 우려낸 기름 민어 영양의 핵심
뜨겁고 구수한 민어탕 한 그릇 싹 비우면 이열치열의 시원함이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해마다 한여름이면 어머니는 민어탕을 끓인다. 대대로 서울에 살아온 외가에서는 복달임을 민어로 한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여름이 다가오면 외삼촌들은 어머니에게 "올여름에는 언제 먹느냐"며 민어탕을 끓이라는 압력을 은근하게 넣는다. 40도에 육박하는 찜통더위에 수십 명이 먹을 매운탕을 끓이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다. 힘들 텐데 싫진 않은지, 어머니는 복날이 다가오면 수산 시장 단골집에 전화해 "큰 놈 들어왔느냐"고 수소문한다. 민어는 커야 맛있다. "10㎏은 돼야 제맛이 난다"고도 한다.

민어는 여름이 제철이다. 8월 산란기를 앞두고 몸집도 커지고 기름도 가장 오른다. 대개 동물성 식재료는 암컷을 더 쳐주나, 민어는 그렇지도 않다. 서울의 대표적 호남식 한정식집 '해남천일관' 이화영 대표는 "큰 민어가 워낙 귀해서 암컷 수컷 가려 받을 수 없는 입장"이라며 "손님에게 낼 수 있는 살은 적고 팔 수 없는 알만 많으니 식당 입장에선 암컷이 걸리면 손해"라고 했다. 알로 영양이 쏠려 살에서 기름기가 빠져 퍽퍽해진다고도 한다.

식당에서는 민어를 주문하면 회·전·탕으로 낸다. 큰 민어는 회를 뜨면 참치처럼 부위별로 맛이 다르다. 분홍빛이 감도는 뽀얀 흰색의 민어 뱃살은 기름지면서 부드럽다. 등살은 담백하고 차지다. 뱃살과 등살 사이 중뱃살은 뱃살과 등살을 섞은 듯한 맛이다. 운동량이 많은 꼬리·지느러미 부근은 탄력이 강하고, 한가운데는 부드럽다. 탄탄하면서도 말랑말랑 부드러운 식감. 비린내도 거의 없어 인절미를 씹는 듯하다.

"민어는 회보다 전으로 먹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생선"이라고 말하는 식도락가들도 있다. 흰 살 생선이지만 기름이 충분히 올라 퍽퍽하지 않고 포슬포슬 촉촉하게 입안에서 바스러진다. 민어 마니아들은 부레(아가미)와 껍질을 최고로 친다. 부레는 두부처럼 부드러운 부분과 질긴 부분이 붙어 있다. 부드러운 부분은 입에 넣으면 체온만으로도 살살 녹는다. 질긴 부분은 씹으면 젖은 한지를 뭉쳐 놓은 듯한데, 씹을수록 고소하다. 끓는 물로 살짝 데친 껍질은 쫄깃쫄깃 씹는 맛이 별나다.

괜찮은 민어가 구해질 듯하면 어머니는 날을 잡고 민어탕 끓일 준비를 한다. 집에서는 민어를 탕으로만 먹는다. 비싼 민어를 온 가족이 나눠 먹으려면 회, 전 등 각종 요리로 즐기는 사치가 힘들다. 어머니는 당신의 민어탕이 외할머니에게서 전수받은 정통 서울식이라고 했다. 국물을 민어 대가리와 뼈로만 내지 않고 소고기 사태 육수와 섞는 게 핵심 포인트. 소고기 국물에 민어 살을 넣고 끓이는 민어감정과 매운탕의 혼합 절충형일지도 모르겠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이철원 기자

마침내 민어 먹는 날이 되면 외가 온 가족이 모인다. 그 전날 종일 끓인 국물에 고춧가루와 된장, 다진 마늘 따위 양념을 푼다. 국물이 펄펄 끓으면 큼직하게 토막 친 민어 살과 부레를 넣는다. 어머니는 "국물 낼 때부터 함께 끓이면 부드러운 민어 살이 다 풀어지기 때문에 따로 뒀다가 마지막 먹기 전 익힌다"고 했다. 민어탕이 완성되면 배분 작업이 시작된다. 커다란 사발에 민어 한 토막, 잘게 썬 부레 서너 점을 담고 국물을 붓는다. 민어 살과 뼈에서 흥건하게 우러난 기름이 반드시 같이 담겨야 한다. "민어 영양의 핵심이 바로 이 기름"이란다.

민어탕을 받아들면 '그렇잖아도 더워 죽겠는데 이 뜨거운 민어탕을 그 고생해가며 끓이고 먹어야 하나'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땀을 뻘뻘 흘려가며 뜨겁고 칼칼하고 구수한 민어탕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에어컨 바람과는 차원이 다른 시원함이 온몸에 감돈다. 그야말로 이열치열의 맛이다. 무더위를 무탈하게 견뎌낼 힘을 얻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민어가 꽤 잡혔지만 남획으로 씨가 마르다시피 했다. 과거 민어는 서울 토박이나 호남 출신들이나 먹었다. 하지만 이제 전 국민의 보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잖아도 물량이 부족한데, 수요가 증가하니 가격이 폭등했다. 백성 민(民) 자가 이름에 들어가는 게 무색할 정도로 일반 서민은 맛보기조차 어려운 값비싼 생선이 돼 버렸다. 이화영 대표는 "복날이 낀 주에는 민어 가격이 1㎏당 10만원까지 나가기도 한다"며 "너무 비싸서 손님에게 내기조차 힘들 정도"라고 했다.

다행히도 남해의 한 양식장에서 최근 민어 양식에 성공했다. 얼마 전까지 민어는 양식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졌었다. 종묘 배양이 극히 어려운 데다 양식 시간이 최하 3년으로 다른 어종보다 길어서 채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양식을 통한 대량 생
산에 성공하면서 대형 마트에서 판매까지 시작했다. 덕분에 민어를 그나마 너무 비싸지 않은 가격에 맛보게 됐다. 양식 민어 맛이 어떤지는 아직 확인 못 했다.

올해는 아직 어머니의 민어탕을 못 먹었다. 어머니는 "올여름은 더워도 너무 더워 도저히 못 하겠다"고 한다. 입술이 쩍쩍 들러붙는 기름진 국물이 자꾸 생각 난다. 압력과 설득과 회유를 살살 해봐야겠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02/20170802032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