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2.24 03:16
어느 군중을 택해 거기에 투항하면 그 지지자를 얻는다
그런 맛에 한번 빠지면 더욱 그쪽으로 깊이 빠져들게 든다
글 쓰는 스트레스가 더욱 심해졌다. 두 기관차가 마주 돌진해오는 탄핵 정국에서 다른 소재를 택할 수 없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군중(群衆)과 일치하면 고민할 것은 없다. 문제는 불화(不和)를 빚을 때다. 군중에게 맞서는 것은 정치권력·경제권력과 맞붙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걸 언론인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군중의 흐름에 역행해 헤엄쳐가다 보면 자신이 고립무원의 곤궁한 처지에 빠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독자마저 떠나버린다. 이 때문에 진보 매체에 소속된 언론인이 개인적으로는 다른 입장을 갖고 있어도 '촛불 군중'에 반하는 글을 쓰기 어렵다. 가령 "특정 정치·이념 세력에 의해 촛불이 변질되고 있다. 나라가 두 동강 나기 전에 이제 멈춰야 한다. 헌재(憲裁)의 기각 판결이 나면 승복 못 한다는 야권 대선 주자들은 법치(法治)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비판을 가하려는 시도는 그쪽 동네에서는 '부역 행위'처럼 된다.
보수 매체 언론인들도 '태극기 군중'의 일부 터무니없거나 맹목적인 주장에 비판을 가하는 데 주저하게 됐다. 만약에 "야권 대선 주자들을 '빨갱이'나 '종북 세력'으로 몰아가는 것은 온당치 않다. 특검에 출두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향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응원하는 것도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라고 지적하면 이들은 자신의 애국심을 모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편이 갈린 군중의 세상에서 매사 회의적이고 개인주의자이며 전체주의적 사고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일부 언론인은 글을 쓰는 데 상당한 위기에 직면한 셈이다. 소심해져 스스로 글을 검열하고 있을지 모른다. 프랑스 사회학자 귀스타브 르봉의 '군중심리'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예전에 여론을 지도했던 언론도 정부와 마찬가지로 군중 세력 앞에 무릎을 꿇은 지 오래다. 단순한 정보 전달자로 전락한 언론은 이제 어떤 사상이나 신조를 강조하려는 모든 노력을 완전히 포기해버렸다. 군중의 변덕스러운 모습에 대해 취재하지만 이마저도 치열한 독자 유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보도된다. 조직된 군중은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오늘날만큼 그 역할이 중요한 시대는 없었다.'
이 책의 출간 연도는 1895년, 우리 역사로 치면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게 살해당한 해다. 이미 그때 서구 사회에서는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관찰 연구했던 것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군중의 위력(威力)은 이미 그전부터 있었고 새로울 게 없구나. 그 시절의 군중심리나 지금의 군중심리가 달라진 게 없다니, 놀라움과 함께 안도감을 준다.
친분 있던 인사들이 요즘 갑자기 왜 낯설게 보이는지도 이해하게 됐다. 유력 정치인이 어느 날 군중 앞에서 사람이 바뀐 것처럼 대통령을 위한 열정적 연설을 하는 것을, 균형 감각을 잃지 않았던 언론인 출신이 사실관계의 한쪽 면에만 집착하는 것을…. 군중에 편입되는 순간 뚜렷한 개성을 소유한 사람들이라도 그 정체성이 사라진다. 이들이 살아온 삶, 학력, 교양, 직업, 빈부와 상관없이 하나의 집단정신에 지배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스스로도 긴가민가하던 자신의 생각은 군중 속에서 시간이 갈수록 맹목적 확신으로 바뀐다. 집단 최면에 걸리는 것과 같다.
어느 날 탄핵 반대에 앞장서 온 한 변호사에게 법리를 하나씩 따져 묻자, 그는 "이런 식의 질문은 받지 않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평소 같으면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닐 것으로 본다. 이성적으로 따져보고 반론과 토론을 수용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선을 찾았을 것이다.
군중에 포함되면 독립된 개인이 갖고 있던 이성과 책임감, 절제심은 잘 작동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단순 과격하고 선동적인 언사(言辭)가 군중을 훨씬 쉽게 움직인다. 헌재(憲裁)의 재판정에서 법률 대리인이 "시가전이 생기고 아스팔트가 피로 덮일 것" "영국 크롬웰 혁명에서 100만명 이상 시민이 죽었다" 같은 발언을 쏟아냈을 때 군중에게는 영웅적 행위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집회에 참석해야만 군중심리에 빠져드는 것은 아니다. 사회 전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감염되고 있다. 가령 북한 미사일 실험이 알려졌을 때나 김정남이 살해됐을 때도 한 종편 TV는 톱뉴스로 한결같이 박 대통령 관련 문제를 다뤘다. 방송 책임자는 이미 감염된 것이다. 어느 한쪽 군중을 택해 거기에 투항하면 그 지 지자를 얻을 수 있다. 그런 맛에 한번 빠지면 더욱 그쪽으로 깊이 빠져들게 든다.
지금으로부터 122년 전, 귀스타브 르봉이 간파했던 진실은 "군중의 정신이 저급해 보여도 그 조직에 간섭하다간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도 본능적으로 안다. 군중에게 맞서려는 것은 위험하다. 그럼에도 마주 보고 달려오는 두 기관차의 제동 역할에 누군가 나서야 한다.
군중의 흐름에 역행해 헤엄쳐가다 보면 자신이 고립무원의 곤궁한 처지에 빠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독자마저 떠나버린다. 이 때문에 진보 매체에 소속된 언론인이 개인적으로는 다른 입장을 갖고 있어도 '촛불 군중'에 반하는 글을 쓰기 어렵다. 가령 "특정 정치·이념 세력에 의해 촛불이 변질되고 있다. 나라가 두 동강 나기 전에 이제 멈춰야 한다. 헌재(憲裁)의 기각 판결이 나면 승복 못 한다는 야권 대선 주자들은 법치(法治)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비판을 가하려는 시도는 그쪽 동네에서는 '부역 행위'처럼 된다.
보수 매체 언론인들도 '태극기 군중'의 일부 터무니없거나 맹목적인 주장에 비판을 가하는 데 주저하게 됐다. 만약에 "야권 대선 주자들을 '빨갱이'나 '종북 세력'으로 몰아가는 것은 온당치 않다. 특검에 출두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향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응원하는 것도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라고 지적하면 이들은 자신의 애국심을 모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편이 갈린 군중의 세상에서 매사 회의적이고 개인주의자이며 전체주의적 사고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일부 언론인은 글을 쓰는 데 상당한 위기에 직면한 셈이다. 소심해져 스스로 글을 검열하고 있을지 모른다. 프랑스 사회학자 귀스타브 르봉의 '군중심리'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예전에 여론을 지도했던 언론도 정부와 마찬가지로 군중 세력 앞에 무릎을 꿇은 지 오래다. 단순한 정보 전달자로 전락한 언론은 이제 어떤 사상이나 신조를 강조하려는 모든 노력을 완전히 포기해버렸다. 군중의 변덕스러운 모습에 대해 취재하지만 이마저도 치열한 독자 유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보도된다. 조직된 군중은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오늘날만큼 그 역할이 중요한 시대는 없었다.'
이 책의 출간 연도는 1895년, 우리 역사로 치면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게 살해당한 해다. 이미 그때 서구 사회에서는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관찰 연구했던 것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군중의 위력(威力)은 이미 그전부터 있었고 새로울 게 없구나. 그 시절의 군중심리나 지금의 군중심리가 달라진 게 없다니, 놀라움과 함께 안도감을 준다.
친분 있던 인사들이 요즘 갑자기 왜 낯설게 보이는지도 이해하게 됐다. 유력 정치인이 어느 날 군중 앞에서 사람이 바뀐 것처럼 대통령을 위한 열정적 연설을 하는 것을, 균형 감각을 잃지 않았던 언론인 출신이 사실관계의 한쪽 면에만 집착하는 것을…. 군중에 편입되는 순간 뚜렷한 개성을 소유한 사람들이라도 그 정체성이 사라진다. 이들이 살아온 삶, 학력, 교양, 직업, 빈부와 상관없이 하나의 집단정신에 지배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스스로도 긴가민가하던 자신의 생각은 군중 속에서 시간이 갈수록 맹목적 확신으로 바뀐다. 집단 최면에 걸리는 것과 같다.
어느 날 탄핵 반대에 앞장서 온 한 변호사에게 법리를 하나씩 따져 묻자, 그는 "이런 식의 질문은 받지 않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평소 같으면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닐 것으로 본다. 이성적으로 따져보고 반론과 토론을 수용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선을 찾았을 것이다.
군중에 포함되면 독립된 개인이 갖고 있던 이성과 책임감, 절제심은 잘 작동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단순 과격하고 선동적인 언사(言辭)가 군중을 훨씬 쉽게 움직인다. 헌재(憲裁)의 재판정에서 법률 대리인이 "시가전이 생기고 아스팔트가 피로 덮일 것" "영국 크롬웰 혁명에서 100만명 이상 시민이 죽었다" 같은 발언을 쏟아냈을 때 군중에게는 영웅적 행위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집회에 참석해야만 군중심리에 빠져드는 것은 아니다. 사회 전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감염되고 있다. 가령 북한 미사일 실험이 알려졌을 때나 김정남이 살해됐을 때도 한 종편 TV는 톱뉴스로 한결같이 박 대통령 관련 문제를 다뤘다. 방송 책임자는 이미 감염된 것이다. 어느 한쪽 군중을 택해 거기에 투항하면 그 지
지금으로부터 122년 전, 귀스타브 르봉이 간파했던 진실은 "군중의 정신이 저급해 보여도 그 조직에 간섭하다간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도 본능적으로 안다. 군중에게 맞서려는 것은 위험하다. 그럼에도 마주 보고 달려오는 두 기관차의 제동 역할에 누군가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