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1.27 03:02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 정경화 특파원 르포]
25~58세 실직자 중 2000명 선정, 한달에 71만원씩 무조건 지급
소득 발생해도 깎이는 일 없어 저임 일이라도 하게 만드는 효과
실업수당에만 기대는 사람 줄어… "구직 포기자까지 혜택" 비판론도
5년째 실직 상태인 그의 월 소득은 실업수당을 받을 때보다 90유로(약 11만원)가 줄었다. 그러나 그는 현지 언론 YLE 인터뷰에서 "변화에 만족한다"고 했다. 그동안은 아르바이트해 조금만 근로소득이 생겨도 그만큼 실업수당이 깎였지만, 이제는 임시 일자리를 구해 돈을 벌어도 기본 소득을 2년간 계속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기간제 일자리를 추천받아도 각종 수당이 끊길까 봐 거절하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냈다"며 "앞으로는 '수당 노예'에서 벗어나 적게 벌어도 정상적으로 일하는 시민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기본 소득, 실업수당보다 적지만 조건 없이 지급
핀란드는 올 1월 전국의 25~58세 실직자 17만여 명 중 2000명을 선정해 앞으로 2년간 기본 소득을 월 560유로씩 지급하는 기본 소득제 시행에 들어갔다. 대신 기존에 지급하던 실업·육아·질병 수당은 지급하지 않는 조건이다. 국가 단위로 이 제도를 시행하는 건 핀란드가 처음이다.
기본 소득은 기존 수당과 달리 소득세를 내지 않는다. 아르바이트는 물론 정규 일자리를 구해 근로소득이 발생해도 그대로 지급된다. 핀란드 사회보장국 마르유카 투루넨 법무담당관은 "핀란드 기본 소득은 복지를 추가하는 게 아니라, 이를 대체하는 개념"이라며 "온갖 수당이 엉켜 통제가 불가능해진 복지 제도를 재정비하고 실업자의 근로 의욕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다.
핀란드의 실업수당은 실직 전 소득의 70%에 이를 정도로 높아, 실업자의 재취업이나 창업 의지를 방해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핀란드 정부는 실업자가 기본 소득에만 의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생산 활동에 나서 '기본 소득+근로소득'을 거두게 되면 경제 활성화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이 제도를 도입했다. 2년간 실험을 거쳐 성과가 있으면 기본 소득을 6~7단계로 세분화해 지급 대상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실업자 근로 의욕 올리고, 복지 행정 비용 줄인다
핀란드의 기본 소득 월 560유로(약 71만원)는 기존 실업수당보다 적은 액수다. 작년 스위스가 도입하려다 국민투표에서 부결된 기본 소득은 월 300만원에 달했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시가 도입하려는 기본 소득 128만원보다도 적다. 올리 캉가스 사회보장국 수석연구위원은 "핀란드는 스위스처럼 많은 돈을 나눠줄 여력이 없다"며 "(고액의 기본 소득은) 실업자가 근로 의욕을 되찾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핀란드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비 규모가 1980년 17.7%에서 작년 30.8%까지 늘어났다. 각종 복지 제도가 40여 가지에 이른다. 기본 소득제는 수십년간 복잡하게 불어난 각종 복지 제도를 통폐합해 행정 비용을 줄이자는 의도도 있다. 핀란드 실직자는 실업증명서, 아르바이트 소득증명서, 직업훈련 확인서 등을 4주마다 제출하고 사회보장국은 이를 심사해 다음 달 수당을 결정한다. 질병수당, 육아수당 등은 따로 신청해야 한다. 그러나 기본 소득 대상자는 2년 동안 서류 한 장 내지 않아도 월 560유로를 받는다. 그만큼 행정 비용이 대폭 줄어든다.
◇"세금 낭비에 실업 완화 효과 없다"는 반론도
기본 소득에 대한 반대도 적지 않다. 구직을 포기한 실업자까지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받는 것은 세금 낭비라는 것이다. 헬싱키 시민 에투(30·영업직)씨는 "알코올중독자는 보드카 마시는 데 기본 소득을 모두 탕진할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 인공지능(AI)과 가상현실(VR)등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본격화하면 일자리 자체가 줄기 때문에 기본 소득을 줘도 실업 문제는 완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 투루넨 법무담당관은 "기본 소득을 받으면서 새로운 기술을 익히도록 직업 훈련 제도를 보완하면 기본 소득이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대량 실업에 대응하는 새롭고도 유연한 사회안전망이 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