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12.28 03:04
[64] 러시아 연해주에서 만난 잊힌 우국지사 최재형
안중근, 신채호, 이상설… 숱한 독립투사들 북적이던 러시아 연해주
군수품 납품으로 부자 된 함경도 노비 아들 최재형… 전 재산 털어 독립투쟁 주도
안중근과 국내진공작전… 안중근은 최재형 집 마당에서 사격 훈련
1920년 4월참변 때 가족들 만류에도 '살 만큼 살았다'며 일본군에 체포돼 산기슭에서 처형
우리가 무심했던 연해주 투사들의 흔적
안중근 '코레아 우라!'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그리고 그가 소리쳤다. "코레아 우라!" 서른 살 먹은 의병장 입에서 나온 언어는 중국어도 일본어도 조선어도 아닌 러시아어였다. 왜?
황해도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안중근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사라지면서 망명을 떠난다. 그가 독립을 위해 군사훈련을 하고 의지를 키운 공간이 바로 두만강 건너 러시아 연해주였다. 그가 무명지를 잘라 독립의 결의를 다진 곳도 러시아였고, 그가 권총을 품고 기차를 탄 곳도 연해주였다. 프리모르스키(바다와 접한 땅)라는 러시아 극동지역을 사람들은 연해주(沿海州)라 부른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그리고 그가 소리쳤다. "코레아 우라!" 서른 살 먹은 의병장 입에서 나온 언어는 중국어도 일본어도 조선어도 아닌 러시아어였다. 왜?
황해도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안중근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사라지면서 망명을 떠난다. 그가 독립을 위해 군사훈련을 하고 의지를 키운 공간이 바로 두만강 건너 러시아 연해주였다. 그가 무명지를 잘라 독립의 결의를 다진 곳도 러시아였고, 그가 권총을 품고 기차를 탄 곳도 연해주였다. 프리모르스키(바다와 접한 땅)라는 러시아 극동지역을 사람들은 연해주(沿海州)라 부른다.
민족주의 사학자요 언론인 신채호, 헤이그 밀사 이상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언론인 장지연,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만주 벌판을 휩쓸며 일본군을 떨게 만든 무장 홍범도. 이들이 민족운동의 기초를 닦은 곳이 바로 연해주다. 지금은 중국과 북한, 러시아 3개국 국경이 맞닿은 나진 선봉 지역 개발이 한창이지만, 100년이 채 안 되는 현대사의 초입 연해주는 독립투사들의 전진기지였다.
역사책을 읽다 보면 느닷없이 안중근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장지연과 이상설이 나오고 홍범도와 이동휘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느닷없다. 분단 와중에 연해주에서 벌어진 역사가 공백으로 남아 있던 탓이다. 러시아와 수교를 하고, 학자들이 조금씩 발굴해낸 연해주 독립투쟁사에 낯선 이름 하나가 등장한다. 최재형(崔在亨·1860~1920)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불꽃처럼 살다 간 사내 이야기다.
연해주 이민사와 최재형
1863년 함경도에 살던 조선인 가족 13명이 두만강을 넘었다. 권력층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었고 백성들은 가난과 착취에 시달리던 때였다. 함경도 사람들을 시작으로 많은 사람이 두만강을 넘었다. 혹자는 청나라 쪽 만주로 갔고 혹자는 러시아 쪽 연해주로 갔다. 1869년 대홍수가 함경도를 덮쳤다. 함북 경원에 살던 노비 최홍백 가족은 연해주를 택했다. 아홉 살짜리 아들 재형도 함께였다. 가난은 러시아까지 쫓아와서, 굶어 죽은 시체 더미를 치워가며 사람들은 살았다. 러시아 지방정부가 조선인들을 위해 보리와 밀가루를 배급해줄 정도였다.
역사책을 읽다 보면 느닷없이 안중근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장지연과 이상설이 나오고 홍범도와 이동휘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느닷없다. 분단 와중에 연해주에서 벌어진 역사가 공백으로 남아 있던 탓이다. 러시아와 수교를 하고, 학자들이 조금씩 발굴해낸 연해주 독립투쟁사에 낯선 이름 하나가 등장한다. 최재형(崔在亨·1860~1920)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불꽃처럼 살다 간 사내 이야기다.
연해주 이민사와 최재형
1863년 함경도에 살던 조선인 가족 13명이 두만강을 넘었다. 권력층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었고 백성들은 가난과 착취에 시달리던 때였다. 함경도 사람들을 시작으로 많은 사람이 두만강을 넘었다. 혹자는 청나라 쪽 만주로 갔고 혹자는 러시아 쪽 연해주로 갔다. 1869년 대홍수가 함경도를 덮쳤다. 함북 경원에 살던 노비 최홍백 가족은 연해주를 택했다. 아홉 살짜리 아들 재형도 함께였다. 가난은 러시아까지 쫓아와서, 굶어 죽은 시체 더미를 치워가며 사람들은 살았다. 러시아 지방정부가 조선인들을 위해 보리와 밀가루를 배급해줄 정도였다.
사람들이 연추(煙秋)라고 부르던 얀치혜에서 최재형은 러시아학교에 다녔다. 러시아문학과 문화와 역사를 배웠다. 그리고 2년 만에 인근 항구도시 포시에트로 가출을 했다. 상선 노동자로 일하다가 선장 부부 귀여움을 받았다. 표트르 세메노비츠라는 이름도 받고, 세례도 받았다. 선장을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오가며 세계를 보았다. 6년 뒤 17세가 되니, 가출한 노비 아들이 어엿한 인텔리로 변해 있었다. 선장 주선으로 블라디보스토크 무역회사에 취직을 하고, 러시아 군부대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고기를 납품하며 큰돈을 벌었다. 최재형은 부자가 되었다. 얀치혜 읍장이라는 관직도 얻었다. 1905년 개화파 박영효가 돈 많은 동포 최재형을 일본으로 초청했다. 그해에 나라가 망했다. 선진 일본에서 목격한 망국. 사내의 삶 궤적이 바뀌었다.
동의회, 안중근 그리고 최재형
동의회, 안중근 그리고 최재형
한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흘러와 신천지를 개척했다. 볕 잘 드는 해안가 언덕에 길을 내고 집을 짓고 마을을 만들었다. 조선인들은 개척리(開拓里)라고 불렀고 뜻 모르는 러시아인들은 게체기라 불렀다. 공식적으로 카레이스카야 슬라바다, '한인 거리'라 했다. 조선에서 망명한 우국지사들이 개척리로 몰려들었다.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숙여지는 옛 사람들이 개척리 골목길에 북적였다.
그 무렵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투사들이 동의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1905년 이래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항일 조직이 통합된 단일 조직이었다. 발기인은 헤이그 밀사로 갔던 이위종, 갑부 최재형, 의병장 안중근 등이고 결의한 장소는 얀치혜에 있는 최재형의 집이었다. 회의에서 최재형이 동의회 총장에 선출됐다. 안중근은 우영장이라는 참모장급 무관이었다.
최재형의 딸 올가의 회고록에는 이런 추억이 나온다. "노보키에프스크(현 크라스키노)에 살 때였다. 안응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듣기로 누군가를 사살할 준비를 한다고 했다. 우리 집 마당 벽에 사람 셋을 그려놓고서 권총 사격 훈련을 하고 있었다. 소냐 언니와 함께 마당에서 자주 보았다. 안응칠이 하얼빈으로 가서 어떤 일본 군인을 죽였다. 그래서 자기도 죽었다고 얘기 들었다. 아이들과 부인이 있었는데, 우리 엄마가 음식도 주고 옷도 주고 떠날 때 보따리도 많이 주었다."
안중근이 하얼빈으로 떠날 때 소지한 신분증은 대동공보 기자증이었다. 대동공보는 최재형이 만든 신문이다. 주필은 장지연이었다. 하얼빈까지 동행했던 동지 우덕순은 최재형이 총재로 있던 동의회 회원이었다.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 반병률은 "안중근 개인이 아니라 최재형과 동의회가 치밀하게 계획한 거사"라고 평가했다. 최재형은 재산을 팔고 군자금을 모아서 러시아로부터 무기와 군복과 군수품을 구입했다. 그리고 국내 진공작전을 몇 차례씩 성공하게 하고 나온 결과가 안중근 거사였다. 최재형은 러시아법원에서 안중근 사건을 다루리라 예상해 변호사까지 선임해뒀지만, 일본이 관할하는 바람에 계획은 좌절됐다. 안중근은 순국했다.
신한촌과 대한국민의회
그 무렵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투사들이 동의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1905년 이래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항일 조직이 통합된 단일 조직이었다. 발기인은 헤이그 밀사로 갔던 이위종, 갑부 최재형, 의병장 안중근 등이고 결의한 장소는 얀치혜에 있는 최재형의 집이었다. 회의에서 최재형이 동의회 총장에 선출됐다. 안중근은 우영장이라는 참모장급 무관이었다.
최재형의 딸 올가의 회고록에는 이런 추억이 나온다. "노보키에프스크(현 크라스키노)에 살 때였다. 안응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듣기로 누군가를 사살할 준비를 한다고 했다. 우리 집 마당 벽에 사람 셋을 그려놓고서 권총 사격 훈련을 하고 있었다. 소냐 언니와 함께 마당에서 자주 보았다. 안응칠이 하얼빈으로 가서 어떤 일본 군인을 죽였다. 그래서 자기도 죽었다고 얘기 들었다. 아이들과 부인이 있었는데, 우리 엄마가 음식도 주고 옷도 주고 떠날 때 보따리도 많이 주었다."
안중근이 하얼빈으로 떠날 때 소지한 신분증은 대동공보 기자증이었다. 대동공보는 최재형이 만든 신문이다. 주필은 장지연이었다. 하얼빈까지 동행했던 동지 우덕순은 최재형이 총재로 있던 동의회 회원이었다.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 반병률은 "안중근 개인이 아니라 최재형과 동의회가 치밀하게 계획한 거사"라고 평가했다. 최재형은 재산을 팔고 군자금을 모아서 러시아로부터 무기와 군복과 군수품을 구입했다. 그리고 국내 진공작전을 몇 차례씩 성공하게 하고 나온 결과가 안중근 거사였다. 최재형은 러시아법원에서 안중근 사건을 다루리라 예상해 변호사까지 선임해뒀지만, 일본이 관할하는 바람에 계획은 좌절됐다. 안중근은 순국했다.
신한촌과 대한국민의회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 콜레라가 창궐했다. 러시아 당국은 개척리 한인촌을 언덕 너머 하바로프스카야 거리로 이전 결정을 내렸다. 최재형은 동지들과 함께 새로운 한인촌에서 새로운 조직, 권업회(勸業會)를 만들었다. 회장은 최재형, 총회 의장은 이상설이었다. 홍범도도 함께였다. 명칭은 상공회의소 격이었으나 실질은 무력 투쟁 능력까지 갖춘 독립투쟁조직이었다. 일본은 영사관을 통해 러시아에 권업회를 해산시키라 요구했다. 최재형과 친했던 러시아 극동 총독 곤다치는 이를 거부하고 본인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대동공보와 함께 발행한 권업신문은 가갸거겨 온통 항일과 민족 기사투성이였다. 권업회 사무실은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카야 거리에 있다. 상해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의 집 옆이다. 그때 거리는 노바 카레이스카야 슬라바다, '신한촌(新韓村)'이라 했다. 사무실 건물도 이동휘의 집도 사라지고, 지금은 한국 생활용품점으로 변했다.
1919년 3·1운동이 터졌다. 한국에는 한성정부가, 중국에는 상해정부가 설립됐다. 러시아에서는 대한국민의회가 설립됐다. 최재형은 대한의회 외교부장이 되었다. 세 정부는 상해정부로 통합됐다. 최재형은 통합정부 재무총장에 임명됐으나 거부했다. 아파트촌으로 변한 옛 신한촌 언덕에 세 임시정부와 남북한, 연해주 고려인을 상징하는 신한촌 기념탑이 서 있다.
1920년 4월 참변 그리고 최재형
1919년 3·1운동이 터졌다. 한국에는 한성정부가, 중국에는 상해정부가 설립됐다. 러시아에서는 대한국민의회가 설립됐다. 최재형은 대한의회 외교부장이 되었다. 세 정부는 상해정부로 통합됐다. 최재형은 통합정부 재무총장에 임명됐으나 거부했다. 아파트촌으로 변한 옛 신한촌 언덕에 세 임시정부와 남북한, 연해주 고려인을 상징하는 신한촌 기념탑이 서 있다.
1920년 4월 참변 그리고 최재형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성공했다. 연해주까지 불어닥친 사회주의혁명에 서방 국가가 개입했다. 1920년 4월 4일 영국과 미국 군대가 연해주에서 철군했다. 바로 그날, 일본군이 러시아 부대와 한인 마을을 습격했다. 그보다 한 달 전, 러시아 극단주의자 트랴피친 부대가 일본 민간인 수천명을 살해한 데 대한 보복이기도 했다. 그때 최재형은 우수리스크에 살고 있었다. 열 살이었던 딸 올가가 회상했다.
"4월 4일 아버지가 밤늦게 돌아왔다. 엄마와 누나들은 아버지를 보고 빨치산부대로 도망가라고 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절대 그럴 수 없다. 내가 도망치면 너희 모두 일본군에 죽는다. 나는 살 건 다 살았다. 너희를 위해 내 목숨을 바칠 수 있다.' 얘기는 밤새 이어졌다. 엄마는 밤새 울었다. 우리도 많이 울었다. 아침이 왔다. 아이들은 자고 있었다. 아버지는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뒤 이웃집 아줌마가 들어와서 '너희 아버지를 군인들이 체포해갔다'고 소리치며 들어왔다. 언니가 밖으로 나갔을 때 멀어져가는 차만 보였다." 이인섭이라는 독립운동가가 기록한 최재형의 최후는 이렇다. "김리직, 최재형, 엄주필 기타 지도자들은 감옥이 있는 데서 멀지 아니한 왕바실재라는 산기슭에서 학살하고 땅에 묻은 후에 종적을 감추기 위하여 평토(平土)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최올가의 구술을 받아 최재형의 손자 최발렌친이 쓴 책에 나온 이야기다.
나는 이 이야기를 최재형이 살았던 그 집에서 10분 거리,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사무실에서 들었다. 러시아어 책을 센터장 김발레리아가 한국어로 읽어주었다. 읽다가 발레리아가 울었다. 사무실에 있는 모두가 울었다. 문화센터 마당 화단에는 안중근을 기리는 기념탑이 눈을 맞고 서 있었다. 96년 전 봄날 일본 헌병이 가득했던 우수리스크 거리도 눈밭으로 변했다. 큰 별이 지는 뒷모습을 보았다. 세상은 고요했다.
*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최재형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2007년 4월 7일 모스크바에 사는 최재형의 손자 최발렌친은 최재형의 총살 추정지인 우수리스크 감옥 뒤편 언덕에서 87년 만에 할아버지에게 제사를 올렸다. 2014년 대한민국 재외동포재단은 최재형 고택을 매입했다. 2016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최재형의 손자 최발렌친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했다. 나는 몰랐다. 당신은 아는가, 그 이름 최재형을.
"4월 4일 아버지가 밤늦게 돌아왔다. 엄마와 누나들은 아버지를 보고 빨치산부대로 도망가라고 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절대 그럴 수 없다. 내가 도망치면 너희 모두 일본군에 죽는다. 나는 살 건 다 살았다. 너희를 위해 내 목숨을 바칠 수 있다.' 얘기는 밤새 이어졌다. 엄마는 밤새 울었다. 우리도 많이 울었다. 아침이 왔다. 아이들은 자고 있었다. 아버지는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뒤 이웃집 아줌마가 들어와서 '너희 아버지를 군인들이 체포해갔다'고 소리치며 들어왔다. 언니가 밖으로 나갔을 때 멀어져가는 차만 보였다." 이인섭이라는 독립운동가가 기록한 최재형의 최후는 이렇다. "김리직, 최재형, 엄주필 기타 지도자들은 감옥이 있는 데서 멀지 아니한 왕바실재라는 산기슭에서 학살하고 땅에 묻은 후에 종적을 감추기 위하여 평토(平土)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최올가의 구술을 받아 최재형의 손자 최발렌친이 쓴 책에 나온 이야기다.
나는 이 이야기를 최재형이 살았던 그 집에서 10분 거리,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사무실에서 들었다. 러시아어 책을 센터장 김발레리아가 한국어로 읽어주었다. 읽다가 발레리아가 울었다. 사무실에 있는 모두가 울었다. 문화센터 마당 화단에는 안중근을 기리는 기념탑이 눈을 맞고 서 있었다. 96년 전 봄날 일본 헌병이 가득했던 우수리스크 거리도 눈밭으로 변했다. 큰 별이 지는 뒷모습을 보았다. 세상은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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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최재형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