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소추-2016·12·9 표결

[한겨레 사설] 촛불이 이뤄낸 탄핵, 사회 개혁의 출발점으로

최만섭 2016. 12. 10. 08:17

[한겨레 사설] 촛불이 이뤄낸 탄핵, 사회 개혁의 출발점으로

등록 :2016-12-09 18:15수정 :2016-12-09 22:20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9일 국회에서 압도적으로 가결됐다. 국민을 배신한 통치자를 국회, 곧 국민이 불신임한 것이다. 국회의 역사적 결정을 끌어낸 주역은 광장에 켜진 수백만의 촛불이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장 1조를 새삼 확인케 해준 민심이 경외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탄핵 의결이 시민혁명의 끝은 아니다. 박 대통령은 국민과 맞서 싸울 태세를 취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은 언제 내려질지 모른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국회의 탄핵 의결은 광장에 울려 퍼진 시민의 목소리가 우리 정치·사회 전반의 큰 변화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국회의 탄핵 의결까지 온 과정을 되돌아보면, 특정 정당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 시민의 ‘집단지성’이 역사적인 무혈혁명을 선도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정치권이 자진 사퇴와 탄핵, 질서 있는 퇴진 등 여러 해법 사이에서 오락가락할 때, 흔들리는 여야 정치인을 다잡으며 탄핵 의결까지 몰고 온 건 오로지 시민의 힘이었다. 그래서 광장의 목소리가 평화적으로 국회를 압박해서 대통령 탄핵을 끌어낸, 세계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값진 성과를 이뤘다. 이 경험이 우리 정치를 상식의 정치, 정상의 정치로 복귀시키는 계기로 작용해야 한다.


시민의 힘으로 일군 명예혁명

광장의 외침은 국회의 탄핵 의결에 머물지 말라고 말한다. 두 달 가까이 지속된 광화문 촛불집회의 구호는 ‘박근혜 하야’만이 아니었다. 정유라씨의 이화여대 부정입학으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 불평등과 양극화의 심화, 정의의 실종과 부의 대물림에 대한 분노가 오랜 기간 전국에서 수백만 촛불을 밝힌 밑불이었다. 정치·경제·문화 등 우리 사회 전체를 바꿔야 한다는 요구를 외면하고 단지 대통령 한 사람을 탄핵하는 선에서 상황을 마무리하려 해선 안 된다. 시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정치에 반영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건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가 됐다. 탄핵 이후, 여야 정당이 차기 대통령선거라는 눈앞의 정치적 이익만을 위해 달려가선 지금보다 훨씬 큰 위기에 봉착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우리 사회 보수의 기반이었던 ‘박정희 모델’의 종언을 뜻한다. 2012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국민의 선택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이었다. 그렇게 박근혜 대통령은 1970년대 아버지의 통치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검찰·국가정보원 등 권력기관에 의존한 통치, 재벌의 돈을 걷어 사익을 취하고 그 대가를 제공하는 정경유착, 노동자와 시민의 기본권 부정, 반공 제일주의 등 박정희 패러다임의 온갖 패악을 답습한 게 바로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본질임이 분명히 드러났다. 극우 파시즘을 ‘보수의 가치’로 치장해온 새누리당과 족벌 언론, 우익 세력은 이제 ‘박정희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번 사태가 건강하고 합리적인 보수로 새롭게 탄생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촛불은 앞으로도 꺼지지 않을 것이다. 1960년 4월 혁명이나 87년 6월 항쟁처럼 시민의 뜨거운 열망이 정치제도의 부분적 개선에서 멈추는 일이 이번에도 반복돼선 안 된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박 대통령이 하루라도 빨리 퇴진하는 게 절실하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진퇴 문제를 국회 결정에 맡기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국민과 국회의 불신임이 분명하게 확인된 이상, 헌법재판소 심판을 기다릴 필요 없이 깨끗하게 사퇴하는 게 옳다. 끝까지 법적 다툼을 벌이며 두 달 넘게 이어지는 국정 공백과 혼란을 방치하는 건, 자신을 믿고 뽑아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박정희 모델’ 철저히 청산해야

황교안 국무총리는 물론 그가 이끄는 내각도 이번에 함께 ‘정치적 탄핵’을 받았음을 준엄하게 인식해야 한다. 지금 내각은 새누리당과 함께 국민 신뢰를 상실한 지 오래다. 친박을 제외한 여야 정치세력은 지금 당장 황교안 국무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를 대체하는 문제를 본격 논의하기 바란다. 그런 인사에게 불과 몇 개월이라도 대한민국호의 키를 맡기는 것은, 한시라도 빨리 국정 동력을 회복해서 경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적절하지 않다.

더욱 중요한 것은, 촛불 민심이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 사회가 대담하고 도도하게 선회하는 일이다. 사회 전반의 적폐를 청산하는 출발점이 바로 탄핵안 가결이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을 방임하고 은폐하는 데 도움을 준 재벌, 검찰을 비롯한 권력기관, 언론 등 각 부문의 개혁을 실질적으로 시작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정치권은 그런 작업을 법적,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을 권력을 향한 대선 레이스의 시작으로만 생각해선, 국회와 정치권 모두 국민의 거대한 분노의 표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대통령을 탄핵한 주역은 정치권이 아니라 국민임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