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10.27 03:17
'원칙의 정치인'이던 朴대통령
국민의 분노가 증폭돼 더 큰 위기 가져오기 전에 원로에게 백방으로 지혜 구하고
여야 협치에 도움 청하면서 백의종군 심정으로 수습 나서야
엊그제 오후 박근혜 대통령이 TV 화면 앞에 섰다. 비선 실세로 알려진 최순실씨 파문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19년 전이 떠올랐다. 1997년 11월 바닥난 달러 곳간을 정부가 시인하고 IMF 구제금융을 신청한다고 경제부총리가 발표하던 장면이다. 그 순간 대통령 리더십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지난 40년간 대한민국에 근 20년 간격으로 심각한 리더십 공백이 닥쳤다. 박근혜 대통령만큼 국가적 위기 국면과 인생 궤적이 맞물린 인물도 드물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만 스물일곱에 세상에서 단절돼 긴 칩거에 들어갔다. 그를 정치 무대로 끌어낸 것이 18년 만인 1997년 IMF 외환 위기였다. '달러 부도'로 초유의 경제 위기를 맞은 나라를 위해 봉사하겠다며 정치에 입문해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그가 19년 만인 지금 '통치력 부도'를 내고 국가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
박 대통령은 단아하고, 검소하며, 약속은 지킨다는 이미지로 지지층에게 각인돼 있었다. 아버지가 물려준 정치적 유산에, 모진 세월을 인내하며 지켜온 절제와 품위 덕분에 보수층의 지지를 받아 오늘의 자리에 올랐다. 노련한 국정 운영은 못 했어도 반칙이 횡행하는 우리 사회에 최소한 원칙을 세우는 개혁 정도는 추진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형제자매까지 멀리하며 지켜온 '원칙의 정치인'이라는 정치적 자산이 '반칙 대마왕'인 최측근에게 의존하고 휘둘린 상황이 드러나면서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박 대통령이 아버지 서거 이후 쓴 일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지금 상냥하고 친절했던 사람이 나중에 보니 이(利)에 기가 막히게 밝은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덧없는 인간사이다.'(1981년 3월 2일 일기)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몇 번 만나만 보아도 그 됨됨이를 알 수 있는 것이 사람이지만 몇 년을 보아와도 그 진짜 모습을 모를 수도 있는 것이 또한 사람이다. 어수룩한 체하면서 속으로는 딴마음을 먹고, 뒤로는 음모를 꾸미고 음흉했던 사람을 기억하게 된다.'(1989년 1월 13일 일기)
서른 나이에도 알았던 세상사 이치를 왜 유독 최순실 일가한테서는 살펴보지 않았을까. 40년 전에도, 대통령이 된 지난 3년여 동안에도 크고 작게 경고 사이렌이 울렸는데도 말이다. 덧없는 게 인간사이고, 알 수 없는 게 사람이니 대통령 되어서는 사적 친분에 의존하지 말고, 공적 관계에서 일 잘한다는 사람들 두루두루 추천받아 받아들이겠다는 아량만 가졌어도 오늘날 이 엄청난 '최순실 게이트'로 리더십이 붕괴하는 악재는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 잃고 세상과 단절됐던 박 대통령을 가장 크게 지배한 것이 '배신의 트라우마'라는데, 결과적으로 국민과는 불통하고 몇 안 되는 인연하고만 소통하는 바람에 박 대통령 스스로가 국민을 배신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엊그제 1분 40초의 짤막한 사과문을 발표한 뒤,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침묵하고 있다. 1997년 외환 위기를 보면서 자서전에 '흔들리는 나라 경제를 바라보며 느낀 위기감에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