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기다림

최만섭 2016. 9. 12. 10:43


제목기다림

 

별다른 취미가 없는 나의 유일한 즐거움은 일요일마다 옷을 두둑이 껴입고 털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완전히 가린 채 물통을 넣은 배낭을 지고 약수터로 뛰어가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가리고 산으로 향할 때마다 사회인이 아닌 자연인으로서 느끼는 자유로움에 젖는다.

 

지난주 일요일에는 평상시보다 많은 3040여 개의 물통이 줄 세워져 있었다. 2시간 정도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모처럼 생긴 한가로움을 즐기고자 약수터 옆 목장으로 향했다. 비탈진 산기슭에 있는 목장의 끝은 어머니 젖무덤같이 아늑한 골짜기와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길가에는 땅속으로 몸을 미처 숨기지 못한 몇 포기의 잔디가 추위에 떨고 있었다.

 

유년 시절에 나의 겨울은 항상 추웠다. 나는 추위에 떨면서 행상 나간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젖어서 어머니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석양 아래 길게 늘어진 엄마의 그림자를 발견하면은 온종일 쌓인 그리움과 반가움이 복받쳐 올라 서러운 눈물을 흘리면서 엄마에게 달려갔다. 어떻게 엄마 품속을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아늑했던 공간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품에 안기면 노란 물감이 맑은 연못에 퍼지듯이 내장에 쌓인 모든 불순물이 치마 속으로 사라져서 나의 육체는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고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하여 만개한 목화 꽃 위를 날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내가 일평생 기다렸지만, 결코 다시 만날 수 없었든 그 행복했든 경험은 사무앨 버케트고도(godot)’와 같이 기다려도 오지 않는 희망이 되어 내 가슴속에 슬픔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기다림인 고도(godot)는 무엇인가? 고도(godot)는 영어의 God(고드/()를 의미한다고 하기도 하며, 죽음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고도는 희망일까? 그렇지도 않다면 고도는 그저 아무것도 아닐까? 고도가 누구이거나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말해줄 수 있는지 질문을 받았을 때, 사무앨 버케트는 내가 그것을 알았다면 작품에서 그것을 말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지루하고 골치 아픈 기다림의 주체는 인간의 마음이 아닐까? 만일 청정한 마음을 지닌 사람의 기다림이 공()이라면 우리의 기다림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지속할 것 같았던 고요는 이면도 체면도 없이 사는 한 할머니가 새치기하고 나서 깨지기 시작했다. “할머니 왜 순서를 안 지키세요?” 젊은 친구가 소리를 질렀다. “물 받는 사람이 없잖아! 아까운 물이 바닥에 떨어지는데 아무나 받으면 어때?” “그러면 그다음 차례가 받아야죠. 여기에 기다리는 분들은 할 일이 없어서 기다린 줄 아세요?” “에구 젊은이가 너무 다그치네.” 기다림의 여유가 없는 늙음은 추해 보일 뿐이다.

 

몇 해 전 역전에서 버스정거장으로 향할 때였다. 30대 중반의 곱 상한 연인이 다가왔다. 검정 치마 위로 분홍색 바탕에 쑥색 무늬가 간간이 박힌 스웨터가 길게 내려진 차림을 보아 한눈에 그녀가 시골 아낙네임을 알 수 있었다. “목련 예식장까지 얼마나 걸려요? 20년 만에 은사님 희수(喜壽) 잔치에 가는데요. 12시부터 시작하거든요.” 나는 갑자기 이솝우화가 생각났다. 농부가 밭에서 일하는데 한 나그네가 길을 물었다. “다음 마을까지 얼마나 걸려요?” 농부는 대답하지 않고 일에만 열중하였다. 열댓 보 걸었을 때 농부가 나그네를 불러 세웠다. “한나절 걸릴 것 같소.” “그러면 왜 진작 알려 주지 않았소?” “당신 걸음걸이를 보아야 측정을 하지.”

 

걸어서 30, 버스로 15, 택시로 10분 걸리는데, 시간 충분하니까 스승님과의 재회의 기쁨을 상상하면서 천천히 걸어가세요.” 그러나 성질 급한 이 젊은 아낙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택시에 올라타고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목적과 목표보다는 그곳에 가면서 선험적으로 그려지는 멋진 그림을 즐기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힌다. 그렇다! 기다림은 크리스마스가 아닌 크리스마스이브다! 기다림은 아기를 막 생산한 어머니가 아니라 산달을 앞둔 산모다!

 

기다림을 생각하다가 문뜩 떠오른 것은 나의 아버지의 죽음이다. 일제(日帝)에 의해 일본 광산으로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다 당하고 해방 이듬해에야 폐병에 걸린 몸으로 귀국한 아버지는 늘 자리에 누워서 살아야만 했다. 행상으로 여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그날도 집에 안 계셨다.

 

문창호지 사이를 뚫고 나온 대낮의 햇살이 누렇게 바랜 이불 위를 방황할 때 초점을 잃은 아버지의 눈동자는 허공을 향해서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는 대나무같이 마른 다리로 방안을 왔다 갔다 하다가 문 쪽을 향해 누운 채로 저세상으로 가셨다. 아버지는 누구를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셨을까? 어머니이었을 것이다. “단칸 셋방에 어린 자식 넷을 맡기고 먼저 가서 정말 미안하오. 얘들을 잘 부탁하오.”

 

개인의 삶은 기다림의 역사다. 그리고 기다림 속에 맞이하는 죽음은 결코 외롭지 않다.  내 초등학교 동창 어머님은 농사짓기 싫다고 가출한 아들을 몇십 년간 기다리다 돌아가셨다. 특히 명절 때면 식음을 전폐하시고 싸리나무 대문에 작은 몸을 기대고 한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형 안 돌아와요. 왜 그렇게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세요?” 내 친구는 울면서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어머니의 고집을 꺽을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기다림은 희망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기다림이란 수레밖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고도(godot)가 아니라 수레에 실린 인간의 따뜻한 마음이다.

 

기다림은 수레에 걸터앉은 가출한 30대 여인의 마음이 되어 건장한 파수꾼을 유혹하고

 

기다림은 수레에 쌓인 중생의 탐욕이 되어 어여쁜 비구니를 현혹하면서

 

기다림은 수레에 누운 공()이 되어 창공을 나는 대붕새 붕을 경배하네.

 

붕새를 타고 만리를 날아온 현자가 현행을 찾아 또 다른 생()으로 떠날 때

 

기다림은 치마폭에 베인 그리움 되어 실연한 시인의 가슴속에서 섧게 우네.

 

 2007년 8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