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휴머니즘 그리고 휴머니스트

최만섭 2016. 9. 6. 10:25


  고전적(古典的) 가치(價値)의 부활(復活)

1. 부활(復活)
일전에 모 신문사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이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로 아일랜드가 선정되었다. 많은 사람이 아일랜드를 선택한 이유는 아일랜드에는 고전적(古典的) 가치(價値)와 현대적 문명이 조화롭게 공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의 고전적 가치는 기독교 윤리(倫理)를 근간(根幹)으로 진실하고 도덕적이며 정의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부활(復活)은 이러한 고전적 가치의 중요성을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다. 19세의 순박한 청년 네흘류도프는 한 여름을 시골 고모네 집에서 보내면서 두 가지 뜻 깊은 경험(經驗)을 하게 된다.

첫 번째는 난생처음 스스로 인생(人生)의 모든 아름다움과 중요함을 깨닫고,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使命)의 참뜻을 이해하며, 자기와 온 세계의 끝없는 완성(完成)의 가능성(可能性)을 발견하고, 완성(完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강력한 희망과 완전한 믿음으로 완성(完成)의 길에 들어설 때 느끼게 되는 감동(感動)을 경험한 것이고, 두 번째는 카츄사라는 하녀와 정신적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카츄사를 만난 후부터 그는 진정한 의미의 행복(幸福)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주관적(主觀的)이면서 자연적(自然的)으로 느껴지는 정신적인 감동이었다. 카츄사가 존재(存在)한 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가슴은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찼으며, 그에게 카츄사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신비함으로 느껴져서 감히 그녀를 육체적 사랑의 대상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사랑에 대한 감정을 경험한 것이다.

3년 후 네홀로도프는 세련된 이기주의자(利己主義者)가 되어 카츄사 앞에 다시 나타난다. 그가 그렇게 변한 것은 잇따른 패배(敗北)에 따른 자괴 감(自愧感) 때문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생각하는 선(善)을 악(惡)으로, 그가 생각하는 악(惡)을 선(善)으로 간주했다. 마침내 그는 모든 문제(問題)를 타인의 결정(決定)에 맡기는 타인 의존형의 인간이 되었다. 주관과 희망을 잃고 생각 없는 사자(獅子)가 된 그는 정욕(情欲)의 대상으로 카츄사를 유린(蹂躪)하고, 그녀의 가슴에 100 루불 짜리 지폐를 남긴 채 그녀의 곁을 떠났다. 10년 후 배심원으로 법정에 출두한 네홀로도프는 법정에선 여 죄수 마슬로바가 바로 자신이 유린했던 카츄사이며,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었고, 그 때문에 고모네 집에서 쫓겨나 창녀로 전락해 끝내는 범죄의 누명까지 쓰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카츄사를 구원하고 갱생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유형 수(流刑囚)가 된 그녀의 뒤를 쫓아 자신도 시베리아로 떠난다. 네홀로도프는 유형 도중에 사귀게 된 많은 정치범으로부터 농노제도의 모순과 기독교의 부패에 대한 실상을 깨닫는다.

소수 귀족들의 즐거움과 만족을 보장하기 위하여, 수백만 농민은 굶주림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타락한 귀족들은 화장품 같은 사치품을 수입하기 위하여 부족한 식량을 수출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부패한 목회자들은 진실(眞實)을 외면한 대가로 평생 호의호식(好衣好食)할 부(富)를 귀족들에게서 제공받았다.

그들이 드리는 기도는 양심(良心)의 가책 없이 또 다른 만행(蠻行)을 저지르기 위한 수단(手段)에 불과했다.

농노제도에 회의(懷疑)를 품던 톨스토이는 공기와 물과 같이 밀을 생산하는 토지(土地)도 개인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혹자는 그를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사회주의자라고 부르지만 그는 인간은 누구나 기아(饑餓)에서 해방될 권리를 갖는다고 느낀 휴매니스트다.

어느 날 밤 여관 방에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에 몰두하던 네홀로도프는 복음서(福音書) 속에서 자신과 카츄사의 갱생(更生)의 길잡이를 발견하게 된다. 사랑과 용서를 바탕으로 다음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며 사는 것이다.

1. 살인하지 말라. 형제에게 화를 내서도 안 되고 누구든지 보잘 것 없다거나 어리석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2. 간음하지 말라.

3. 무슨 일에서도 맹세를 하고 약속하지 말라.

4. 복수하지 말라.

5. 원수를 사랑하고 도우며 그들을 위하여 봉사하라.

우리가 타인을 용서해야만 하는 까닭은 죄 없는 사람은 없고, 따라서 벌을 주거나 바르게 가르치거나 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언제든지 누구나 용서하며 몇 번이고 끝없이 용서해야만 하는 것이다.

갱생(更生)의 길을 찾은 네홀로도프는 성인(聖人)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처음에는 야릇한 일, 역설, 농담처럼 여겨진 생각이 차츰 실생활 속에 확증을 찾아내게 되고 그러는 동안에 갑자기 아주 단순한, 의심할 수 없는 뚜렷한 진리(眞理)로서 보이게 되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네홀로도프의 삶은 아이에서 사자(獅子)로, 사자(獅子)에서 아이로, 아이에서 성인(聖人)으로 다시 태어났다. 성인(聖人)은 아이에게 버거운 현실(現實)이라는 수레를 대신 끄는 종심소욕(從心所欲)이나 불유구(不踰矩)인 마부다. (자신의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2. 루터와 칼뱅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신학 대학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가 발부한 면죄부(免罪符)의 부당성(不當性)을 폭로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내다 걸었다. 이 통상적인 관례 행위가 신교인 프로테스텐트(Protestant/저항하는 사람이란 뜻)태동의 계기가 될 줄은 루터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쿠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술로 그의 반박문이 삽시간에 독일 전역으로 퍼져 정국(政局)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빠진 것이다.

그의 중심사상은 성서 중심주의, 평등주의 및 기존 교회의 부정 등이었다. 루터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가톨릭의 부패(腐敗)가 독일 정치의 발전을 저해하므로, 독일의 주권(主權)을 로마의 교권(敎權)에서 독립시켜야 한다는 신념(信念)을 가진 정치 개혁가였다. 그는 연방군주의 비호(庇護)를 받으면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역설(力說)했다. 그는 독일 귀족들에게 독일을 로마로부터 해방(解放)하고 교회의 재산과 토지를 접수하라고 호소했다. 1524년 독일 슈튈링 백작 령에 농민전쟁이 발생했다. 농민들이 농노제 폐지와 봉건제도의 타파 등을 요구하자 루터는 귀족들에게 농민을 가혹(苛酷)하게 진압할 것을 권고했다. 이로 인해 2년 동안 10만 여명의 농민이 죽임을 당해야 했다.

루터는 민중(民衆)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 냉정한 현실주의자 이었다.

루터를 계승한 프로테스턴트의 황제라고 불리는 장 칼뱅(1509-1564)은 순수한 종교개혁(宗敎改革)을 주장하였다. 칼뱅은 가톨릭이 부패한 이유를 상층(교회)에서는 도덕(道德)이, 하층(시민)에서는 규율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도덕을 부활하기 위해서는 타락한 성직자를 교회에서 훈련(訓鍊)과 교육(敎育)을 통해 거듭나게 하여야 한다면서, 이를 전담하기 위한 교회기구로 장로제를 주창(主唱)하였다.

칼뱅은 현실에서의 참된 신앙생활을 신의 뜻과 의지로 해석하는 이른바 예정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여 보는 것보다는 세상에 참여해서 변혁시키는 기독교적 책임을 강조하였다. 고전적 가치는 칼뱅이 말하는 참된 신앙생활이다. 즉 도덕과 규율을 바탕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世上)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정화(淨化)하려는 의지(意志)와 노력(勞力)인 것이다. 나는 시장(市場)과 광장(廣場)에서 수많은 루터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단 한 명의 칼뱅도 만나지 못했다. 왜 이 땅의 종교인(宗敎人)들은 그들의 사명(使命)은 부패한 세상에서의 승리(勝利)가 아니라 타락한 세상의 정화(淨化)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까?.

3. 희망(希望)
우리는 고전(古典)이 죽어가는 슬픈 시대(時代)에 살고 있다. 보신(補身)과 탐욕(貪慾) 만을 생각하는 편집증 환자들은 톨스토이와 칼뱅은 더 이상 필독(必讀)해야 할 고전(古典)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다.

나의 꿈은 고전적 가치가 부활(復活)하는 것이다. 이 시대를 짓누르고 있는 절망(絶望)과 공포(空砲), 이 땅에 난무(亂舞)하는 패륜(悖倫)과 부패(腐敗)는 고전적 가치의 부재(不在)에서 기인(起因)하기 때문이다.

부활(復活)은 생각의 의미(意味)를 깨달은 성인(聖人)이 부르는 희망이라는 행진곡이다. 생각은 나와 이웃, 나와 자연과의 상생(相生)이다. 현실주의자 들이 사자(獅子)들의 서식처(棲息處)를 선호(選好)하고 이상주의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동경(憧憬)하듯이 나는 성인(聖人)의 초라한 집을 사랑한다.

내가 생각하는 성인(聖人)은 진리(眞理)와 신념(信念)을 지키기 위하여 냉혹(冷酷)하고 부패(腐敗)한 현실(現實)과 맞서는 칠순(七旬)의 건장한 노인이며, 내가 꿈꾸는 부활(復活)은 강남대로(江南大路)에서 톨스토이와 칼뱅을 만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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