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6.30 03:04
영국살이 어느새 34년
'半한국인 半영국인' 여기던 딸, 브렉시트 결정 뒤 엄청난 충격
英·EU는 利害만 따진 결혼…
이해타산에 밝은 영국인들이 손해보는 일 계속할 리가
"아빠, 한국 여권 되살릴 수 있을까요?" 브렉시트 투표 며칠 뒤 딸이 진지하게 물어 왔다. 세 살 때 당시 유행하던 혜은이의 '제3한강교' 노래를 부르며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하고 영국에 건너온 그 아이는 지금껏 자신을 반(半) 한국인 반 영국인으로 여기며 두 국가 문화를 공유할 수 있음을 자랑스러워 했다. 이번 투표에도 젊은이답게, 노동당 열성 당원답게 EU 잔류 결과를 위해 주말도 반납하고 가가호호 방문하며 인쇄물을 돌렸다. 그런 딸이 한국인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정도로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이번 사태로 영국인은 물론 온 세계가 충격에 빠졌지만 사실은 이런 대단한 반응이 내겐 더 놀랍다. 왜들 이렇게 놀라는지? 영국이 EU를 탈퇴할 것이라고 왜 생각을 못 했는가? 세상은 영국이 EU 회원국이면서도 유로화를 사용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라는 점을 잊었던 걸까?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적은 월급으로 가계(家計)에 구멍이 나더라도 오순도순 함께 삶을 꾸려가는 것이라면, 부부가 주머니를 따로 찬 이 결혼이 과연 얼마나 가리라고 예상했나? 유로화를 안 쓰는 것이 상징하듯 영국은 1973년 가입 이래 줄곧 EU의 문턱에서 한 발은 안에, 한 발은 바깥에 두고 결코 집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항상 앞뒤를 쟀다.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확신이 정말 완벽하게 들 때까지는 결코 완전히 들어가지 않고 여차하면 밖으로 나간다는 생각이었다. 덕분에 그렉시트(그리스의 EU 탈퇴)를 시발로 터진 유로화 사태는 영국에 큰 피해를 주지 않는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그때 이미 영국은 '봐라! 우리가 얼마나 현명했는지!'라고 뿌듯해했다. 그만큼 영국은 이해타산에 밝은 사람들이다. 절대 손해 보는 일은 안 하는 사람들이다.
역사적으로 영국, 특히 잉글랜드는 한 번도 자신을 유럽의 일원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유럽과 '팔 하나 거리(arm's length)'만큼 떨어져서 관계해 왔다. '분할해 지배하고(divide and rule), 견제해서 균형을 맞추고(check and balance)'가 영국이 유럽을 대하고 다루는 태도였다. 유럽 국가들을 이간질하고 서로 반목하게 해서 세력 균형을 추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을 지배하는 유일한 강국이 생기면 영국은 전쟁에 휘말렸다. 영국은 항상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거리를 두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최근 유럽이 '팔 하나의 거리' 안으로 들어와 자신만의 공간이 없어지자 이혼을 결심하게 된 셈이다.
굳이 말하자면 영국과 EU의 관계는 오로지 이해(利害)를 따져 이루어진 결혼이고, 다른 EU 국가들끼리는 이해와 필요가 합쳐져 맺어진 결혼이다. 국경이 맞닿아 있는 국가들엔 'EU에 의한 평화보장'이라는 결혼 사유가 있다. 1, 2차대전 중 극심한 피해를 본 프랑스·독일·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이탈리아가 적극 참여해 EU를 창설했다. 그러나 도버 해협이라는 안전지대를 둔 영국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북해에 홀로 떨어져 있는 아이슬란드와 유럽 대륙 북쪽 끝 노르웨이가 EU에 참여하지 않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병원 처방전을 내주는 저 영국인이 나를 어떻게 느낄까? 저 사람은 과연 어느 쪽에 투표했을까? 평소 친절했던 옆집 가족은 이웃에 사는 우리 가족을 실은 불편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34년 동안 영국에 살면서 해본 적 없다가 이번에 처음 했다. 이걸 위축감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