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돋보기] '지시 대기族'의 사회
입력 : 2016.03.31 03:00
마흔이 다 되어가는 한 친구는 이탈리아 가곡 '카로미오벤'을 끝까지 부를 줄 안다. 술 한잔 마시면 '카로미오벤, 크레디미알멘…' 하며 이탈리아어 가사를 기가 막히게 뽑아낸다. 어쩐지 창법이 군가(軍歌) 스타일이라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한다. "고등학교 때 가사를 우리말로 받아 적어 외웠지. 가창 시험 때 틀리면 맞을 것 같아서." 이 친구는 '카로미오벤'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오, 나의 연인'이란 뜻이다).
감수성을 채워야 할 음악 수업이 주입식 교육과 결합한 '웃픈'(웃기는데 슬픈) 사연은 회고담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국의 고질적 주입식·군대식 문화가 '21세기엔 창의적이어야 살아남는다'는 강박과 합쳐지면서 웃지 못할 일이 점점 더 많이 벌어진다.
'캐주얼 위크의 악몽.' 한 금융회사에 다니는 A 부장이 최근 들려준 시트콤 같은 얘기를 듣고 떠오른 제목이다. 이 회사는 얼마 전 정장 대신 캐주얼 복장을 입는 이른바 '캐주얼 위크'를 실시했다. 자유로운 패션을 통해 사고를 유연하게 바꾸자는 취지였다. 캐주얼이라고는 등산복밖에 없는 A 부장은 고민 끝에 그냥 정장 차림으로 출근했다가 인사부에서 경고 전화를 받았다. "캐주얼 위크에 정장은 안 됩니다. 자유로운 복장이라는 지침을 지키세요." A 부장은 '충분히 자유롭게 입지 않은 죄'로 징계를 받을 뻔했다며 어쩔 수 없이 편한 옷 두 벌을 마련했다고 토로했다.
창의성을 짓누르는 이런 관료주의와 형식주의를 타파한다며 삼성전자는 지난 24일 '스타트업(start up) 삼성 컬처 혁신' 선포식을 했다. 실리콘밸리의 유연한 스타트업 문화를 지향점으로 내세웠다. 이날 삼성은 젊은 직원들이 주먹을 불끈 쥔 사진을 배포했는데, 팔목마다 정체불명 전구가 달려 있었다. '전구 팔찌'의 용도가 궁금해져 수소문한 끝에 이런 답을 들었다. "강당의 조명을 일단 어둡게 바꿉니다. 사회자가 '스타트업! 삼성!' 이렇게 구호를 외치면 자리에 앉은 사람 중 일부만 팔찌의 전구를 켭니다. 단상 위에서 볼 때 팔찌의 불빛으로 만든 커다란 글씨 'START UP'이 보이게끔 한 거죠." '확 바꾼다'는 선포식에서조차 구호 외치기, 집단행동 같은 구태(舊態)가 반복된 셈이다.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 소설 '유괴천국'엔 '지시 대기족(族)'이란 표현이 나온다. 과도한 주입식 교육 탓에 지시 없이는 놀지도 못하는 아이들을 풍자하는 말이다. 요즘 한국의 아이들은 한술 더 떠 '창의성 교육 학원'에 가서 창의력을 훈련하고, 취 업 준비생들은 창업 학원에 가서 '스펙'을 위한 임시 스타트업을 차린다. 창의성―학원, 스타트업―선포식, 창조경제―실적보고처럼 앞뒤가 안 맞는 일들이 엉망으로 뒤섞여 갈팡질팡한다. 자유와 창의조차 꽉 짜인 틀 속의 지침과 과제로 만들어버리는 사회가 숨이 막힌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우선 '창의적이어야 한다는 지시'부터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감수성을 채워야 할 음악 수업이 주입식 교육과 결합한 '웃픈'(웃기는데 슬픈) 사연은 회고담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국의 고질적 주입식·군대식 문화가 '21세기엔 창의적이어야 살아남는다'는 강박과 합쳐지면서 웃지 못할 일이 점점 더 많이 벌어진다.
'캐주얼 위크의 악몽.' 한 금융회사에 다니는 A 부장이 최근 들려준 시트콤 같은 얘기를 듣고 떠오른 제목이다. 이 회사는 얼마 전 정장 대신 캐주얼 복장을 입는 이른바 '캐주얼 위크'를 실시했다. 자유로운 패션을 통해 사고를 유연하게 바꾸자는 취지였다. 캐주얼이라고는 등산복밖에 없는 A 부장은 고민 끝에 그냥 정장 차림으로 출근했다가 인사부에서 경고 전화를 받았다. "캐주얼 위크에 정장은 안 됩니다. 자유로운 복장이라는 지침을 지키세요." A 부장은 '충분히 자유롭게 입지 않은 죄'로 징계를 받을 뻔했다며 어쩔 수 없이 편한 옷 두 벌을 마련했다고 토로했다.
창의성을 짓누르는 이런 관료주의와 형식주의를 타파한다며 삼성전자는 지난 24일 '스타트업(start up) 삼성 컬처 혁신' 선포식을 했다. 실리콘밸리의 유연한 스타트업 문화를 지향점으로 내세웠다. 이날 삼성은 젊은 직원들이 주먹을 불끈 쥔 사진을 배포했는데, 팔목마다 정체불명 전구가 달려 있었다. '전구 팔찌'의 용도가 궁금해져 수소문한 끝에 이런 답을 들었다. "강당의 조명을 일단 어둡게 바꿉니다. 사회자가 '스타트업! 삼성!' 이렇게 구호를 외치면 자리에 앉은 사람 중 일부만 팔찌의 전구를 켭니다. 단상 위에서 볼 때 팔찌의 불빛으로 만든 커다란 글씨 'START UP'이 보이게끔 한 거죠." '확 바꾼다'는 선포식에서조차 구호 외치기, 집단행동 같은 구태(舊態)가 반복된 셈이다.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 소설 '유괴천국'엔 '지시 대기족(族)'이란 표현이 나온다. 과도한 주입식 교육 탓에 지시 없이는 놀지도 못하는 아이들을 풍자하는 말이다. 요즘 한국의 아이들은 한술 더 떠 '창의성 교육 학원'에 가서 창의력을 훈련하고, 취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朝鮮칼럼 The Column] 민족경제론 진영에 가담한 서강학파 김종인 (0) | 2016.04.04 |
---|---|
[사설] '변덕 정책·엉뚱 규제'로 인한 손해 정부가 배상하는 法 있어야 (0) | 2016.04.02 |
[발언대] 면세점, 과열 경쟁 부작용 최소화해야 (0) | 2016.03.30 |
자동차 자율주행 기술 (0) | 2016.03.30 |
[朝鮮칼럼 The Column] 국민연금기금, 주인은 2100만 가입자다 (0) | 2016.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