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복지에 활용' 공약, 총선 앞두고 각 黨서 또 내놔 가입자가 노후 위해 갹출한 돈 특정 계층 위해 쓰는건 잘못 미래 세대 부담 늘리고 젊은 층에 빚 떠넘기게 돼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공공 기관 하나를 꼽으라면 어디일까. 그 답은 경제사회적 환경 변화라는 시대 흐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급격한 고령화가 최대 현안이 된 오늘날 국민연금공단만큼 중요성이 큰 기관도 없을 듯하다. 노령연금 제도 운용의 막중한 책임에다가 최근 520조원을 넘어선 거대한 자금을 운용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세계 3대 연기금으로 성장한 국민연금의 자산 규모는 7년 후에는 1000조원 수준으로 커질 전망이다. 그래서인지 정치권의 관심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총선이 다음 달로 다가오면서 국민연금을 복지에 활용하겠다는 선거 공약이 되살아났다. 국민의당은 국민연금을 재원으로 임대주택을 지어 35세 이하 청년과 신혼부부에게 제공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고 더불어민주당도 국민연금기금으로 공공 임대주택, 국공립 어린이집 확충 등 공공 부문에 투자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정부 여당 역시 국민연금 이슈에서 아주 예외는 아니다. 지난 1월 국토부는 중산층을 위한 기업형 임대주택(뉴스테이)에 국민연금을 투입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심각한 20~30대의 소득 감소와 주거 문제, 최악의 청년 실업률, OECD 최저 수준의 출산율 등을 감안하면 공공복지 투자의 단기적 순기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국민연금기금은 가입자가 노후를 위해 피땀 흘려 갹출한 보험료로 조성된 '주인 있는 돈'인 만큼 정치권이나 정부가 마음대로 특정 계층을 위해 쓸 자금이 결코 아니다.목적이 좋아도 수단이 잘못됐다면 문제다. 기금을 당겨쓰는 것은 결국 미래 세대의 부담을 늘리고 젊은 층에 빚을 떠넘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난해 말 기준 국민연금 가입자는 2157만명에 이르러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2012년 처음으로 가입자 2000만 시대를 연 이후 꾸준히 증가한 데에는 노후 불안이 커지면서 국민연금에 기대려는 사람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최근 가입자 증가세는 남성보다 4배나 높은 증가율을 보인 여성이 주도하고 있다. 특히 일하는 여성과 함께 국민연금 의무 가입 대상이 아닌 전업주부의 임의 가입이 급증하는 추세다. 아울러 일용직 근로자의 가입도 대폭 늘어났다는 사실은 취약 계층 가입자들에게 노후 자금으로서 국민연금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는 의미다.
국민연금의 장기 추계에 따르면 기금 규모는 2040년대에 2500조원을 정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해 보험료 인상 등 제도 개선이 없는 한 2060년쯤 소진될 전망이다. 공공복지 분야 투자 확대로 수익률이 떨어지게 되면 실제 기금 고갈 시기는 앞당겨지고 그 피해는 저소득층에 상대적으로 더 클 수밖에 없다. 국가재정으로 지원해야 할 사업을 연기금에 기대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반대로 기금 운용 수익이 커질 경우 고갈 시점은 늦춰진다. 연평균 수익률을 1%포인트 높이면 소진 시기를 8년 늦춰 연금 재정 안정에 보탬이 되는 구조다. 이 때문에 기금 운용의 효율성 향상과 경쟁력 강화는 저성장 저금리 기조가 굳어지는 현 금융 경제 여건에서 더욱 절실하다.
국제적 수익률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가운데 기금 운용 역량을 높이기 위한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숙제다. 국민연금 거버넌스 개혁의 핵심 내용은 비전문가 중심의 기금운용위원회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 수준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체제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 금통위의 기준 금리 결정에 정치나 정부의 개입이 있을 수 없듯이 기금 운용의 자율성은 확실히 보장돼야 한다. 현재 추진 중인 기금운용공사 설립이라는 하드웨어 개혁이 물론 장점은 있지만 좀 더 본질적인 혁신 과제는 운용 시스템 선진화라는 소프트웨어 개혁이다.
국민연금을 정치에 끌어들여서는 안 될 다른 이유는 의결권 행사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국내 최대 기관투자자로 이미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7%를 점하고 국내 주요 기업의 대주주로 부상하고 있다. 투자 가치 제고와 지배 구조 개선을 위한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는 필요하지만 부작용은 극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연기금은 정치적 목적이나 정책적 수단으로 동원돼선 안 된다. '수익성과 안정성' 추구라는 기금 운용 원칙이 훼손되면 어렵게 쌓아온 연금 제도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 잃게 된다.
지난주 이세돌·알파고 간 '세기의 대결'이 보여주듯 인공지능을 포함한 제4차 산업혁명이 급속히 진전되고
있다. 세계경제 불확실성과 금융시장 변동성이 커지는 패러다임 변혁기에 정치권의 총선 경쟁은 포퓰리즘의 유혹을 떨치고 국가 미래를 위한 정책 대결로 펼쳐져야 한다. 과감한 구조 개혁을 통한 경제 체질 개선만이 나라를 살릴 길이고, 국민연금을 돌려쓰는 편법은 정도(正道)가 아니다. 2100만 가입자의 노후가 달린 종잣돈이 선거용 쌈짓돈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