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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진의 길 위에서] 꽃보다 장맛인 순창의 봄!

최만섭 2016. 3. 23. 21:07

[오태진의 길 위에서] 꽃보다 장맛인 순창의 봄!

    입력 : 2016.03.22 03:00

    전북 순창 '전통 고추장 민속마을'… 내려가 醬 담그면 반 년후 보내줘
    3년 지난 천일염, 물로 녹여내려 메주 독에 부으니 숨쉬기 시작
    마음까지 녹이는 편안한 장맛에 올봄은 꽃보다 醬으로 열었네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나직한 돌담 안에 홍매가 피어 내다본다. 작고 야무진 다섯 장 홑꽃잎을 막 열었다. 대문은 절 일주문처럼 높다랗다. '명인 전통 고추장'이라는 붓글씨 편액을 운치 있게 달았다. 한옥 마당 가득 백 스무 개쯤 장독이 들어찼다.
    *

    홍매梅-붉은 빛깔매화. [비슷한 말] 홍매화.

    홑-꽃잎[발음 : 혿꼰닙]-활용 : 홑꽃잎이[혿꼰니피], 홑꽃잎만[혿꼰님만]-명사-<식물> 겹으로 이루어진 꽃잎[비슷한 말] 단엽단판4() ㆍ

    일주-문[발음 : 일쭈문]-명사-<건설> 같은 데서 기둥 줄로 배치한 .


    항아리들은 금줄을 둘렀다. 새끼에 숯과 고추, 솔가지를 끼워놓았다. 아기 낳은 집 대문에 내걸던 그 금줄이다. 삿된 것궂은 이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한다. 장독 배엔 창호지로 버선 본을 떠 코가 위로 가게 붙였다. 옛날 버선발로 벌레를 죽이곤 했기에 벌레들이 피한다고 한다. 거꾸로 붙인 것은 잡귀며 벌레가 기어오르다 버선코에 막혀 갇히라는 뜻이다.
    • 삿되다2 (私--)[삳뙤다/삳뛔다]

      [형용사] 보기에 하는 행동이 개인적인 성질을 띠고 있다.

    • 삿되다1 (邪--)[삳뙤다/삳뛔다]

      [형용사] 보기에 하는 행동이 바르지 못하고 나쁘다.


    궂다2[발음 : 굳따]

    활용 : 궂어, 궂으니-형용사

    2번째

    1 . 비나 내려 날씨나쁘다.
    2 . 언짢고 나쁘다.

    어원 : 궂다<석보상절(1447)>


    지난주 볕 좋은 날 전북 순창 '전통 고추장 민속마을'에 갔다. 대대로 장맛 이어온 마흔 몇 가구가 모여 산다. 한 달 전 조선일보에 이 마을 기사가 짤막하게 실렸다. 3월 5일 도시 사람들이 와 장을 담그면 년을 익혀 보내준다고 했다. 고추장 5㎏, 된장 6㎏, 간장 3.6L가 20만원이다. 아내 말로는 세 식구가 한 해 먹고도 남을 양이라고 한다. 값도 싸단다. 제대로 된 된장·고추장에 굶주려 있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기사에 실린 전화번호는 군청 것이었다. 전화를 건 아내에게 직원이 배정해준 집이 '명인 고추장'이다. 서둘러 예약했지만 정작 그날 가지 못했다. 이른 봄비치고는 호된 폭우가 쏟아져서다. 따로 편할 때 오라고 해서 다시 날을 잡은 게 지난주다.

    '명인 고추장'은 고부(姑婦)가 순창군이 인정한 전통 장류 기능인이다. 한적한 마당에서 며느리 박현순씨가 부부를 맞았다. 여든세 살 조경자씨는 증손자를 등에 업어 어르며 지켜봤다. 읍내에 장 가게를 처음 연 게 1980년대 초였다고 한다. 1997년 군청 서쪽 3㎞ 백산리에 순창군이 고추장 마을을 만들자 옮겨 왔다.

    [오태진의 길 위에서] 꽃보다 장맛인 순창의 봄!
    /이철원 기자
    할머니는 한 해 내내 손 멈출 새 없는 게 장(醬) 일이라고 했다. 메주 빚어 띄우고 장독에 담근 뒤론 아이 키우듯 해야 한다. 날 좋으면 뚜껑 열어 햇빛과 바람 쏘인다. 날 궂으면 물과 벌레가 생길까 속 끓인다. 간은 맞는지, 군내는 안 나는지 틈틈이 들여다본다. 가을 된장, 초겨울 고추장 빚으면 다시 메주 철이다.

    고추장 마을은 순창에서 나는 콩과 고추만 쓰게 돼 있다. 개별 거래를 못 하고 마을이 한꺼번에 사들인다니 더 미덥다. 무엇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담그고 맛을 선택할 수 있어 좋다.

    진열된 된장·고추장부터 찍어 맛봤다. 된장은 구수하게 맛 깊고 고추장은 달지 않고 칼칼하다. 됐다! 부부가 마주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느님이 메주 대여섯 덩이를 꺼내 와 아내와 함께 일을 시작했다. 겨우내 잘 띄워 하얀 곰팡이가 피었다. 쿰쿰한 군내가 난다.

    커다란 버킷에 체 걸쳐놓고 소금을 부었다. 3년 넘게 둔 천일염이라고 한다. 간수 잘 뺀 소금을 쥐면 달라붙지 않고 보송보송 새는데 딱 그렇다. 소금에 호스로 물을 뿌려 녹여 내린다. 소금물에 띄운 달걀이 500원 동전만 하게 드러나게 해 소금기를 맞춘다. 얼마나 깨끗한지 체에도 소금물에도 티끌 하나 없다.

    메주에 붙은 먼지며 지푸라기를 솔로 닦는다. 메주를 장독에 넣고 소금물을 붓는다. 숯과 고추를 띄워 잡균과 잡맛을 잡는다. 뚜껑을 닫았다가 뒤늦게 대추를 넣으려고 열었다. 잠깐 사이 메주가 공기방울을 피워올리며 숨을 쉰다. 소금물도 그새 연노랑 빛을 띠었다. 항아리에 들어가자마자 생명을 얻었다.

    장독에 아내 이름 써 붙이고 뒷정리 마치기까지 한 시간 조금 더 걸렸다.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 이제부턴 고부(姑婦)가 돌보며 자연이 익혀주는 일만 남았다. 5월 송홧가루가 마을 덮을 때 뚜껑 열어두면 맛이 한층 더 들 것이다. 원하면 9월에 메주 건져 치대 된장 빚을 때 와 함께해도 좋다고 한다. 아내는 신이 나서 11월 고추장 담글 때도 오겠다고 했다.

    송홧-가루--[발음 : 송화까루/송홛까루]-명사-소나무꽃가루. 또는 그것넣고 휘저어 잡물없앤 말린 가루.


    갈수록 달고 기름진 음식이 득세하는 세상이다. 그래도 20년 넘게 고향 집 장맛이 밥상을 받쳐줬었다. 그러다 십여년 전 기력이 달려 더는 장을 못 담그겠다고 하셨다. 집 된장이 끊기면서 금단증상에 빠졌다. 어딜 가나 고추장은 달큰하고 된장은 깊은 맛 없는 날것이다. 어쩌다 '담근 된장'이 나오는 음식점을 만나면 주인에게 팔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왜 진작 순창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서면서 가을까지 기다리는 동안 먹을 된장·고추장을 샀다. 며느님이 "점심을 대접해야 하는데 외출할 일이 있어서…" 하며 미안해한다. 집에 오자마자 된장찌개를 끓여 맛봤다. 그래 이 맛이다. 공장 된장이 매끄럽지만 차가운 나일론이라면 집 된장은 거칠되 편안한 삼베다. 혀뿐 아니라 마음까지 녹는다. 올봄은 꽃보다 장(醬)으로 열었다. 어느 해보다 즐거운 봄맞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