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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알츠하이머를 앓는 아버지 덕분에…

최만섭 2016. 3. 23. 11:59

[ESSAY] 알츠하이머를 앓는 아버지 덕분에…

입력 : 2016.03.23 03:00

새벽마다 어린 나를 등에 업고 공부방 데려다주시던 아버지
이젠 점점 기억을 잃어가시니… 나는 그저 의무감에 모셨던가
아버지 깊은 사랑 느끼라고 하늘이 주신 기회는 아닌지

문정숙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 사진
문정숙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
어떤 작가는 어린 시절 고향을 소리로 기억한다고 한다. 어머니의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 학교의 종소리, 저잣거리의 시끌벅적한 소리로 고향을 느낀다는 것이다. 내 고향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뒷모습에 있다. 새벽에 아버지 등에 업혀 공부방으로 향하면 도착해서야 겨우 잠이 깨곤 했다. 초등학생 몇 명이 모여 선생님과 노는 수준이었지만, 그 옛날 시골에서 자식을 조금이라도 더 잘 가르치려는 아버지의 의지는 대단했다. 조금씩 크면서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타고 공부하러 다녔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서울로 유학을 가게 돼 고향은 방학 때만 돌아가곤 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역에까지 늘 마중을 나온 아버지께 나는 서울 생활의 고단함을 이야기하기 바빴다. 한번은 철길을 따라 걸으면서 "네가 가는 길도 이 철길 같아야 한다. 옆도 돌아보지 말고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아버지랑 논길, 들길이며 고향 근처 부석사, 소수서원을 틈나는 대로 다녔다. 부석사에서는 힘들게 108계단을 올라가, 굽이굽이 산 모습이 내려다보이는 안양루에 서서 "너도 어른이 되면 어려웠던 일들이 저 발아래 보이는 산처럼 쉬워 보일게다"라면서 "그저 열심히 노력하면 잘될 것"이라고 하셨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조금씩 아버지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자라고 나니 아버지의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도 듣기 싫을 때가 많았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대학교수가 되어서도, 결혼 이후 자식을 낳고 살면서도 아버지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고 늘 어머니 다음에 아버지가 서 계셨다.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형제가 없는 나에게 어머니는 말할 수 없이 귀한 분이셨기에 충격이 너무나 컸다. 혼자 남은 아버지를 모신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선 아버지의 식성을 맞추는 것도, 자주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하는 것도, 간섭과 잔소리도 나에겐 낯설고 힘들었다. 모든 것을 혼자서 해야 하는 어려움이 컸다. 나의 일도, 남편도, 아이도 뒷전이 되어가고 있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노인들이 그렇듯이 한번은 변비가 심해 병원 응급실로 모시게 되었다. 거의 4~5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온갖 검사를 다하더니 병원 측에서는 약만 넣어 주고 "나머지는 환자 가족이 해야 한다"고 했다. 황당했으나 어쩔 수 없이 관장을 해야 했다. 딸인 내가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보기 민망해 쩔쩔매니 옆에 있던 남편이 나섰다. 어렵사리 일을 마치고 집에 오니 서로가 지쳐 말 한마디 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남편에게 미안했다.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일이 이어졌고, 힘들 때면 먼저 가신 어머니에 대한 야속함이 솟구쳤다. 점점 지친다 싶었지만 주말마다 점심을 함께하고, 고향에도 모시고 내려갔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알츠하이머는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그렇다고 여기는 흔한 증세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꼭 옆을 지켜야만 하는 정도가 됐다. 밤새 잠을 못 주무시고 중얼거려 간병인도 그만둔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는 요양병원으로 가시게 됐다. 지금은 딸과 사위는 알아보아도 그곳이 병원인지는 모르신다. 그동안 너무 힘들어 속상해한 적이 많았지만, 이제 너무나 야위어진 모습과, 모든 것을 내게 의지하는 병든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건 고통스럽다. 슬픔과 연민으로 가슴이 메고 생각만 해도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흐른다.

그동안 내 마음은 의무가 지배했던 것 같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최선을 다해야 후회가 없을 것'이라든지, '배운 사람답게 잘해야 한다'든지, '공부시켜 주었으니 조금이라도 갚아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다. 아버지가 딸을 키울 때 들인 정성을 생각하면, 과연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도리를 다한다는 것에 미쳤는가 싶어 부끄럽다.

이제 세월이 흘러 내 앞에 계신 아버지는 내가 바르게 자라기를 바라고 가르치시던 그 아버지가 아니다. 그러나 긴 세월 늘 한편에 서 계셨던 아버지와 함께 마지막 시간을 나눌 수 있게 됐으니 고마운 일이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봄눈 녹듯 사라지고, 잊고 있었던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된 건 더 다행한 일이다. 이런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더 오래 사신 건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알츠하이머는 못다 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했고, 가족의 사랑,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옛날, 아버지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 고향의 시간이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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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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