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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섬진강의 봄

최만섭 2016. 3. 16. 11:01
[ESSAY] 섬진강의 봄

삶은 그 자체로 신비… 세상만사 뜻대로 되는 것 없어
별별 사람 만나 별별 일 겪으니 그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환갑 진갑 지나 돌아보니 참으로 고맙고 과분한 사랑

권이복 남원 도통동 성당 신부 사진
권이복 남원 도통동 성당 신부
필리핀에 다녀왔다. 원주민인 아이타(AITA)들을 위한 학용품과 손톱깎이, 중고 시계, 구충제, 티셔츠, 쌀 등을 나누고 왔다. 수도 마닐라에선 단 하룻밤 묵었는데 그 시끄러움과 지저분함, 곳곳에 널브러진 사람, 사람들. 이렇게 시끄럽고 번잡한 곳에 가 있거나, 장기간 병원 생활을 하노라면 정말 그리운 곳이 있다. 숲, 산길이 그립다. 하여 그날도 바로 산속 깊은 숲 속으로 파고들었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 얼마나 행복한지…. 바삭거리는 낙엽, 폭신한 솔잎 양탄자 어느 하나 아름답고 귀엽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모두가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다정히 무릎을 꿇고 떨어진 낙엽에, 보드라운 흙, 그리고 뾰쪽하게 솟아나는 새순에 살며시 입을 맞추고 볼도 비벼본다. 참으로 행복하다. 모두가 애인이고 친구다. 여기저기 지저귀는 산새 소리가 아이들 합창 소리 같다. 산, 나무, 흙, 하늘, 바람. 그들과 나는 한식구이자 친구, 애인이었다.

이제 곧 이들 속에 묻히리라. 화장해서는 안 된다.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워도 안 된다. 수의도 입히지 마라. 그냥 알몸으로 묻고 표나지 않게 하라. 그냥 흙이 되게 하라. 너도나도 없는 우리, 풀 나무 흙 물 그리고 나, 모두 하나 되어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가! 예전엔 정말 몰랐다. 나무, 풀, 꽃이 그냥 친구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사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 있는 바 그 모든 것과 나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인 것이다. 그 원천과 본질이 결국 하나였던 것이다. 이 엄청난 깨달음은 나를 새롭게 한다. 아니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한다. 비천하고 죄 많은 인간, 찰나를 살다가 연기처럼 사라져가는 인간인 나를 영겁, 영원의 세계에 눈뜨게 한다. 번데기 나방 되어 하늘을 날게 한다. 와!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무엇이 날 이곳에 데려다 놓았는가.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필리핀! 이 나라의 이름은 나를 떨게 한다. IMF가 터지고 농촌 살리자고 만든 김치 공장이 망해가면서 우리 주교님은 날 살리려고 필리핀으로 피신시켰다. 어쩌겠는가! 순명을 서약한 사제로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고문이었다. 지금 고국에서는 하루하루 내 사랑하는 식구들, 날 믿고 따르던 착한 신자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나는 그 먼 타국에서 아무 일도 못하고 바삭바삭 속만 태우고 있어야 했다. 예상했던 대로 공장은 더 버티지 못하고 생산이 중단되고 많은 이들의 재산이 압류되고 또 누군가는 감옥에 가야 할 지경에 몰렸다.

그때 나는 기도했다. '하느님 저 하나만으로 끝내 주십시오. 나 하나 죽음으로 마무리해 주십시오. 이로써 제가 지옥에 간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저 하나만으로 끝내 주십시오.' 그리고 부랴부랴 비행기에 지친 몸을 실었다. 사제인 내가 살려고 온 게 아니라 죽을 생각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아직 난 이렇게 살아 있다. 모든 것엔 다 때가 있는 법, 결국 시간이 해결했다. 진정 삶은 그 자체로 신비다.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 경우엔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몫을 다하는 때도 있다. 한 세상 참으로 별별 사람 별별 일 만나고 겪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 별별 일, 별별 사람들이 오늘 나를 이렇게 만들어 여기에 데려다 놨다. 참 고맙고 감사한 일, 귀하고 은혜로운 사람들이다. 모두가 귀한 은총이요 아름다운 선물이다.동안 너무 힘들어서, 그저 살아남기 급급해 그냥저냥 잊고 살아왔는데, 이제 환갑 진갑을 다져 돌아보니 이 모두가 다 그분-나 사랑하고 날 사랑하는 내 님! 그 임의 손길이었다. 고맙고 감사하다. 너무도 좋고 참 행복하다. 됐다. 이만하면 됐다. 대만족이다. 아니 너무도 과분하다.

섬진강에 봄이 왔다. 칼바람 찬서리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꽃 산수유 예쁘게 피어댄다. 그윽한 향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니 땅딸보 천리향이 쌩긋 웃고 있다. "나 여기 있지롱" 하며 애교를 부린다. 아! 누가 있어 그 누구 어리석은 자 있어 찬서리 눈보라에 죽었다 하는가! 때가 되니 이리도 찬란히 다시 살아나는데 나 또한 이런 생명 중에 한 생명일진데 어찌 죽은들 사라지겠는가! 땅속에 묻혀 썩은들 어찌 사라지기야 하겠는가! 죽은 풀 씨앗 되어 다시 살아나듯 이내 몸 죽어 묻히더라도 때 되면 다시 살아나리라! 따스운 바람 따스한 햇볕 비치면 다시 살아나리라! 꼭 다시 살아나리라! 섬진강에 봄이 왔다. 산수유, 홍매, 청매 향기 온 세상 뒤덮는다. 가히 천하제일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