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그 자체로 신비… 세상만사 뜻대로 되는 것 없어
별별 사람 만나 별별 일 겪으니 그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환갑 진갑 지나 돌아보니 참으로 고맙고 과분한 사랑
이제 곧 이들 속에 묻히리라. 화장해서는 안 된다.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워도 안 된다. 수의도 입히지 마라. 그냥 알몸으로 묻고 표나지 않게 하라. 그냥 흙이 되게 하라. 너도나도 없는 우리, 풀 나무 흙 물 그리고 나, 모두 하나 되어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가! 예전엔 정말 몰랐다. 나무, 풀, 꽃이 그냥 친구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사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 있는 바 그 모든 것과 나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인 것이다. 그 원천과 본질이 결국 하나였던 것이다. 이 엄청난 깨달음은 나를 새롭게 한다. 아니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한다. 비천하고 죄 많은 인간, 찰나를 살다가 연기처럼 사라져가는 인간인 나를 영겁, 영원의 세계에 눈뜨게 한다. 번데기 나방 되어 하늘을 날게 한다. 와!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무엇이 날 이곳에 데려다 놓았는가.
필리핀! 이 나라의 이름은 나를 떨게 한다. IMF가 터지고 농촌 살리자고 만든 김치 공장이 망해가면서 우리 주교님은 날 살리려고 필리핀으로 피신시켰다. 어쩌겠는가! 순명을 서약한 사제로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고문이었다. 지금 고국에서는 하루하루 내 사랑하는 식구들, 날 믿고 따르던 착한 신자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나는 그 먼 타국에서 아무 일도 못하고 바삭바삭 속만 태우고 있어야 했다. 예상했던 대로 공장은 더 버티지 못하고 생산이 중단되고 많은 이들의 재산이 압류되고 또 누군가는 감옥에 가야 할 지경에 몰렸다.
그때 나는 기도했다. '하느님 저 하나만으로 끝내 주십시오. 나 하나 죽음으로 마무리해 주십시오. 이로써 제가 지옥에 간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저 하나만으로 끝내 주십시오.' 그리고 부랴부랴 비행기에 지친 몸을 실었다. 사제인 내가 살려고 온 게 아니라 죽을 생각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아직 난 이렇게 살아 있다. 모든 것엔 다 때가 있는 법, 결국 시간이 해결했다. 진정 삶은 그 자체로 신비다.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 경우엔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몫을 다하는 때도 있다. 한 세상 참으로 별별 사람 별별 일 만나고 겪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 별별 일, 별별 사람들이 오늘 나를 이렇게 만들어 여기에 데려다 놨다. 참 고맙고 감사한 일, 귀하고 은혜로운 사람들이다. 모두가 귀한 은총이요 아름다운 선물이다. 그동안 너무 힘들어서, 그저 살아남기 급급해 그냥저냥 잊고 살아왔는데, 이제 환갑 진갑을 다져 돌아보니 이 모두가 다 그분-나 사랑하고 날 사랑하는 내 님! 그 임의 손길이었다. 고맙고 감사하다. 너무도 좋고 참 행복하다. 됐다. 이만하면 됐다. 대만족이다. 아니 너무도 과분하다.
섬진강에 봄이 왔다. 칼바람 찬서리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꽃 산수유 예쁘게 피어댄다. 그윽한 향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니 땅딸보 천리향이 쌩긋 웃고 있다. "나 여기 있지롱" 하며 애교를 부린다. 아! 누가 있어 그 누구 어리석은 자 있어 찬서리 눈보라에 죽었다 하는가! 때가 되니 이리도 찬란히 다시 살아나는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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