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데스크에서] '한국판'이라는 분칠

최만섭 2016. 3. 12. 09:55

[데스크에서] '한국판'이라는 분칠

입력 : 2016.03.12 03:00

이진석 경제부 차장 사진
이진석 경제부 차장

부산에서 살던 어린 시절, TV에 일본 방송이 잡혔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전파 월경(越境)에 대해 대책이 없었던 모양이다. 한참을 앞서가던 선진국 일본의 방송은 그야말로 '삐까번쩍'했다. 만화영화는 혼을 빼놓을 정도였다. 흑백 방송을 하던 시절에 컬러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어른들은 "서울의 방송국 사람들이 부산에 내려와 1~2주일씩 일본 방송을 보면서 프로그램을 베낀다"고 수근거렸다. 사실인지 확인은 못했지만, 영 없던 일은 아닐 듯싶다.

요즘 정부 정책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난다. 얼마 전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투자 활성화 대책에는 숙박업자가 아니라도 자신의 집을 관광객 등에게 숙소로 제공하고 돈을 버는 걸 합법화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미국의 '에어비앤비(AirBnB·숙박 공유 서비스)'를 도입한다는 것이다. 에어비앤비는 2008년 설립돼 현재 191개국 3만5000여개 도시에서 200여만개의 객실을 제공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기획재정부 관료들이 '한국형 에어비앤비'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다들 그런 줄 안다.

금융위원회가 '만능 통장'이라며 금융 개혁의 대표 상품 가운데 하나로 내세우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도 마찬가지다. 영국에서 지난 1999년 시작됐고, 일본이 증시 부양책의 하나로 지난 2014년 도입해 재미를 본 것을 들여오는 것이다.

지난해 등장했던 정부의 소비 진작책은 아예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라고 제목까지 그대로 베꼈다. 블랙프라이데이는 미국에서 11월 마지막 목요일인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다음 날인 금요일부터 시작되는 대대적인 세일을 뜻한다. 수많은 상점의 장부가 적자(赤字)에서 흑자(黑字)로 전환된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경제 관료들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선진화'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산업 선진화 대책, ○○분야 선진화 정책 등이 흔했다. 미국, 독일 등 선진국에서 하고 있는 정책을 참고했으니 별문제 없을 것이라는 투였다.

한참 뒤처져 쫓아갈 때는 모방이 첩경일 수 있다. 하지만 올해는 2016년이다. 우리도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갖고 있는 나라다. 그런데도 정부 정책이 외국의 성공 사례 수집 정도에 그친다면 어딘가 잘못된 것이다. 대박 상품이 나오면 그대로 베끼는 음료·제과업계의 '미투(Me, too·나도 같은 걸로) 전략'을 비웃을 일이 아니다.

대통령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하는 규제 개혁을 툭하면 뒷걸음질치게 하는 관료, 대통령이나 총리 행차 길에나 겨우 전통 시장이나 수출업체에 가보는 관료,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고 써 붙인 책상을 떠나지 않는 관료가 만들어내는 '수입 번역판 정책'이 쏟아진다. 갤럭시라는 이름에 밀려 사라졌지만, 삼성전자가 만든 애니콜의 첫 광고 문구는 "한국 지형에 강하다"였다. 한국 경제가 갖고 있는 문제에 강한 정책을 만들어내는 관료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