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할머니들에게 희망고문만 했던 한국 정부, 독일처럼 반성 못 하는 日 수준
일본 탓만 할 게 아니라 우리가 대담한 전환 실천하면 日이 오히려 궁지에 몰릴 것
올해 87세인 이용수 할머니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그는 엊그제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정대협) 사무실을 찾았다. 아침 일찍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한·일(韓·日) 외교장관 회담 결과를 지켜보기 위해서다. 이용수 할머니는 두 나라 장관의 발표를 듣고 "일본이 말만 그렇게 하지 실제로 사과한 게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느그(위안부 할머니들)가 돈 벌러 갔으니까 고생했으니까 돈 준다(는 것)…"이라고 하다가 결국 목이 멨다.
대구는 이용수 할머니의 고향이다. 그는 15세 때인 1943년 10월 "이웃이 불러 외출했다가 다른 4명의 여성과 함께 일본군에 끌려갔다"고 했다. 기차와 트럭, 배 등을 옮겨 탄 끝에 도착한 곳이 대만이었다. 그렇게 해서 10대 중반의 나이에 일본군의 성(性) 노리개가 됐다. 2차대전 종전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자신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과거에 대해 누구에게 호소할 수도 없었다. 그는 평생을 혼자 살았다. 지금도 보증금 180만원짜리 영구 임대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다고 한다.
필자가 위안부 문제와 처음 맞닥뜨린 것은 1991년 여름이었다. 외교부를 출입하던 때였다. '일본군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던 몇몇 할머니들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1991년 8월 당시 67세였던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갖고 17세의 나이에 석 달간 일본군위안부로 생활하다 탈출한 사연을 공개했다. 이때부터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본 총리가 한국을 찾았던 1992년 초까지 이 나라는 거대한 '위안부 문제의 불길'에 휩싸였다. 거친 시위가 줄을 이었고 일장기와 일본 정치인에 대한 화형식이 벌어졌다. 오늘 1211회를 맞는 주한 일본 대사관 앞 수요 집회가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위안부 문제가 터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을 향해 초강경 자세를 취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일본 총리를 앞에 두고 "역사와 국민 앞에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다그쳤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초점은 위안부 문제가 아니라 일본 측으로부터 한국 무역 적자의 태반을 차지하는 대일(對日) 무역 역조 개선 방안을 받아내는 쪽에 맞춰졌다. 당시 한·일 막후 실무 협상장에서 만났던 우리 외교관은 "위안부 문제를 대일 무역 역조와 연계하는 협상은 외교관의 양심상 도저히 못 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한·일 경제 협력 방안이 마련됐지만 실질적 한·일 무역 역조 개선 효과는 거의 없었다.
일본 전문가들에 따르면 위안부나 과거사 문제를 다른 무엇인가와 연계하는 우리 측의 협상 전략은 늘 일본에 역(逆)이용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오히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테니 역사적 진실을 밝히자"고 나섰을 때 일본이 가장 당혹스러워했다는 것이다. 실제 일본 측이 위안부 문제에서 가장 전향적인 태도를 취한 것으로 평가되는 고노 담화가 그 직후에 나왔고, 위안부 문제가 처음으로 일본 교과서에 실렸다.
그러나 그 후 25년 가까이 위안부 문제는 쳇바퀴를 돌았다. 우리 정부는 일본에 국가 차원의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솔직하게 이것이 '쉽지 않은 요구'인지를 설득할 용기도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을 향해 대담한 제안을 내놓을 자신도 없었다. 그저 위안부 문제에 관한 국내외의 분노가 비등점을 향해 치달으면 임기응변식 대일(對日) 강경 태도를 취하는 데 급급했을 뿐이다. 우리 정부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이런 식으로 '희망 고문'을 해왔던 것이다.
필자는 종종 어느 일본 총리가 예정에 없이 한국을 찾아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경기도 퇴촌의 '나눔의 집'을 찾아가 머리 숙여 사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곤 했다. 일본과 똑같이 2차대전 전범국가인 독일은 기회 있을 때마다 나치 피해자들을 찾아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일본이 만약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일본을 다시 보게 됐을 것이고 일본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럴 수 없는 나라라는 것이 이번 협상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났다. 독일이 유럽을 넘어 세계의 리더 국가가 된 반면 일본이 이웃 국가들과의 구원(舊怨)에 발목 잡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일본을 상대로 언성을 높이고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우리 스스로 '한국의 입지'를 좁히는 것에 불과하다. 지난 3년 이 정권이 보여준 대일(對日) 외교의 실패가 바로 산 증거다. 한·일 관계는 위안부 협상 타결로 다시 출발점에 섰다. 지금이야말로 일본이 한국을 두렵게 여기도록 만드는 발상의 전환과 외교 전략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다. 위안부 문제를 처음 제기했던 김학순 할머니는 1997년 세상을 떠났다. 김 할머니를 비롯해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했던 200여 분 중 46명만이 생존해 있다. 일본 탓만 할 게 아니라 우리가 진심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보듬었으면 한다.
대구는 이용수 할머니의 고향이다. 그는 15세 때인 1943년 10월 "이웃이 불러 외출했다가 다른 4명의 여성과 함께 일본군에 끌려갔다"고 했다. 기차와 트럭, 배 등을 옮겨 탄 끝에 도착한 곳이 대만이었다. 그렇게 해서 10대 중반의 나이에 일본군의 성(性) 노리개가 됐다. 2차대전 종전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자신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과거에 대해 누구에게 호소할 수도 없었다. 그는 평생을 혼자 살았다. 지금도 보증금 180만원짜리 영구 임대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다고 한다.
필자가 위안부 문제와 처음 맞닥뜨린 것은 1991년 여름이었다. 외교부를 출입하던 때였다. '일본군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던 몇몇 할머니들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1991년 8월 당시 67세였던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갖고 17세의 나이에 석 달간 일본군위안부로 생활하다 탈출한 사연을 공개했다. 이때부터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본 총리가 한국을 찾았던 1992년 초까지 이 나라는 거대한 '위안부 문제의 불길'에 휩싸였다. 거친 시위가 줄을 이었고 일장기와 일본 정치인에 대한 화형식이 벌어졌다. 오늘 1211회를 맞는 주한 일본 대사관 앞 수요 집회가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위안부 문제가 터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을 향해 초강경 자세를 취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일본 총리를 앞에 두고 "역사와 국민 앞에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다그쳤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초점은 위안부 문제가 아니라 일본 측으로부터 한국 무역 적자의 태반을 차지하는 대일(對日) 무역 역조 개선 방안을 받아내는 쪽에 맞춰졌다. 당시 한·일 막후 실무 협상장에서 만났던 우리 외교관은 "위안부 문제를 대일 무역 역조와 연계하는 협상은 외교관의 양심상 도저히 못 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한·일 경제 협력 방안이 마련됐지만 실질적 한·일 무역 역조 개선 효과는 거의 없었다.
일본 전문가들에 따르면 위안부나 과거사 문제를 다른 무엇인가와 연계하는 우리 측의 협상 전략은 늘 일본에 역(逆)이용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오히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테니 역사적 진실을 밝히자"고 나섰을 때 일본이 가장 당혹스러워했다는 것이다. 실제 일본 측이 위안부 문제에서 가장 전향적인 태도를 취한 것으로 평가되는 고노 담화가 그 직후에 나왔고, 위안부 문제가 처음으로 일본 교과서에 실렸다.
그러나 그 후 25년 가까이 위안부 문제는 쳇바퀴를 돌았다. 우리 정부는 일본에 국가 차원의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솔직하게 이것이 '쉽지 않은 요구'인지를 설득할 용기도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을 향해 대담한 제안을 내놓을 자신도 없었다. 그저 위안부 문제에 관한 국내외의 분노가 비등점을 향해 치달으면 임기응변식 대일(對日) 강경 태도를 취하는 데 급급했을 뿐이다. 우리 정부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이런 식으로 '희망 고문'을 해왔던 것이다.
필자는 종종 어느 일본 총리가 예정에 없이 한국을 찾아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경기도 퇴촌의 '나눔의 집'을 찾아가 머리 숙여 사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곤 했다. 일본과 똑같이 2차대전 전범국가인 독일은 기회 있을 때마다 나치 피해자들을 찾아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일본이 만약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일본을 다시 보게 됐을 것이고 일본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럴 수 없는 나라라는 것이 이번 협상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났다. 독일이 유럽을 넘어 세계의 리더 국가가 된 반면 일본이 이웃 국가들과의 구원(舊怨)에 발목 잡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일본을 상대로 언성을 높이고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우리 스스로 '한국의 입지'를 좁히는 것에 불과하다. 지난 3년 이 정권이 보여준 대일(對日) 외교의 실패가 바로 산 증거다. 한·일 관계는 위안부 협상 타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