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정권 결국 '눈물의 세일']
큰소리 치던 치프라스 총리, 국유재산 팔아 곳간 메우기
가혹한 구조조정 잇따르자 공공부문에선 일일 총파업
매물은 항구·공항·철도회사·가스회사·섬, 판매자는 정부, 예상 소비자는 탄탄한 자금력을 가진 글로벌 자본들….
광군제(중국), 블랙프라이데이(미국), 박싱데이(유럽) 등 지구촌 곳곳에서 대규모 세일 행사가 펼쳐지거나 열릴 예정인 가운데, 그리스에서도 큰 장(場)이 선다. 하지만 앞서의 행사들 같은 염가 대매출이 아니다.
구제 금융을 받고 있는 그리스가 거덜난 나라 곳간을 채우기 위해 알짜 국유 자산들을 매물로 내놓은 '눈물의 세일'이다. 일간 카티메리니 등 그리스 언론들은 최근 확정된 매각 계획을 상세히 소개했다.
- 긴축재정 반대 철도 파업 - 12일 그리스 아테네의 기차역에서 한 남성이 철로를 건너고 있다. 이날 그리스 노동계가 전국적으로 24시간 총파업을 벌여 관공서가 문을 닫고, 지하철과 철도 운행이 중단됐다. /AP 뉴시스
세계적 해운 강국 그리스의 '홈그라운드' 두 곳 주인이 내년 바뀐다. 유럽의 대표적 산업항인 피레우스항만 운영권 지분 67%가 매물로 나오자 세계 1위 해운사인 덴마크 AP묄러머스크와 아시아의 대표적 해운사인 차이나코스코(중국), ICTS(필리핀) 등 세 곳이 입찰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리스 최대 항구인 테살로니키항의 지분 67%도 역시 내년 3월까지 매각된다.
철도는 열차·역사 운영권 모두 외국 자본에 넘어갈 공산이 크다. 한국으로 치면 각각 코레일·철도시설공단에 해당하는 공기업인 트레노제와 로스코가 모두 이번 매물에 올랐다. 이 중 로스코에 대해서는 독일 지멘스와 프랑스 알스톰이 입찰 경쟁을 벌이고 있다. 또 트레노제를 손에 넣기 위해 미국 왓코와 루마니아 페로비아르 로만 등 외국 철도회사 2곳이 손잡았다.
국영 가스회사인 데스파도 지분의 66%는 아제르바이잔의 국영 석유회사 소카르에 내년 초까지 매각된다. 인구의 98%가 동방정교 신자인 기독교 국가의 가스 유통망을, 국민 95%가 무슬림인 이슬람 국가가 도맡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올해 초 집권한 좌파 치프라스 정권이 자초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치프라스 정권은 6월 국민 투표를 벌여 IMF와 유럽 채권단의 협상안을 퇴짜 놓는 '벼랑 끝 전술'을 펼쳤다. 그러나 강경 자세를 고수한 채권단에 결국 굴복했고, "국유 자산을 팔아 구조 조정 자금 500억유로(약 62조390억원)를 마련한다"는 조항이 추가된 가혹한 협상안에 서명했다. 현재까지 진행 중인 매각 작업으로 마련할 수 있는 자금은 35억유로로, 목표치의 7%에 불과한 만큼 '국유 자산 세일'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가혹한 구조 조정에 접어든 그리스 사회는 뒤숭숭하다. 12일에는 시리자 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공공 부문에서 일일 총파업이 열렸다. 하지만 구조 조정이 궤도에 오르면서 대외 신인도가 조금씩 높아지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지난달 세계은행 관계자들이 그리스를 찾아 에너지·물류 분야 투자를 논의했다. 그리스 상황은 1997년 IMF 구제 금융을 받은 뒤 한국의 기업·인프라가 대거 외국 자본에 넘어가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코트라 아테네 무역관은 최근 펴낸 보고서에서 "지금이 (우리 기업들엔) 그리스 투자에 관심을 가질 적기"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