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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난민 참극을 접하며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최만섭 2015. 10. 10. 11:35

국제적 난민 참극을 접하며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주간조선 편집장을 새로 맡으면서...

글 | 조성관 주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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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에서 난민 어린이들이 ‘우리를 도와 달라’는 내용의 팻말을 들고 있다. / AP 뉴시스

신문 국제면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미지는 아마도 난민(難民) 사진이 아닐까. 시리아 내전이 4년째 지속되면서 난민의 참상을 보여주는 여러 종류의 사진이 미디어에 노출되고 있다.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다 집단 익사하는 장면부터 밀폐된 컨테이너 트럭을 타고 밀입국하려다 질식해 죽는 장면까지. 홍수를 이루는 그 수많은 사진 중에서 터키 해변가에 엎드려 죽은 채 발견된 세 살 소년 쿠르디 사진만큼 충격을 던진 사진은 없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난민 행렬의 사진을 볼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내가 연둣빛 청춘일 때는 난민 사진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1980년대라고 난민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20대 시절 나는 난민 사진을 무덤덤하게 보곤 했다. 어떤 연민이나 페이소스(pathos)가 일지 않았다.
   
   내가 난민 사진을 가슴 아파하면서 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199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코소보와 르완다에서 대규모 난민이 발생한 시점이었을 것이다. 영토를 갖지 못한 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떠도는 쿠르드족 난민도 나를 힘들게 했다.
   
   1990년대 중반은 개인적으로 내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시점이었다. 두 아이의 가장이 되자 세상이 이전과는 조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부모로부터 강골(强骨)의 유전자를 받지 못했다. 당연 근력(筋力)도 약하다. 운동신경은 제로에 가깝다. 무엇보다 나는 배고픔을 참지 못한다. 조금만 허기가 지면 저혈당 증세가 와서 식은땀이 나고 얼굴이 하얘진다.
   
   난민 사진에서 깊은 연민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신체적 조건과 관련이 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난민 사진을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내가 어느 날 난민 신세가 된다면 과연 내 식솔(食率)을 건사할 수 있나. 힘쓰는 데 젬병인 내가 내 아이들을 양팔에 끼고 국경수비대를 피해 내달릴 수 있을까, 내 아이를 등에 업고 헝가리 국경 철조망을 넘을 수 있을까.
   
   불 한 점으로 겨울을 나는 난민촌 사진을 볼 때도 착잡하다. 아무리 좋은 재능과 머리를 타고난들 난민촌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서는 밝은 미래를 개척하기란 어렵다. 난민촌에서 제대로 된 교육이란 불가능하다.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불행한 세대는 1920~1930년대생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태어나 강제징용과 6·25전쟁을 겪어야 했다. 이들은 1·4후퇴 때 열차 지붕에 개미떼처럼 매달려 부산으로 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는 이런 생각을 했다. 눈보라 휘날리는 흥남부두에 내가 있었다면, 나는 내 아이들을 미군 수송선에 태울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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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조성관 편집장
난민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발생한다. 난민의 참극을 접할 때마다 나는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 그것도 평화의 시대에. 이런 정도의 나라에 태어난 게 그 자체로 축복이고 행운이다.
 
지난 9월 21일자로 주간조선 편집장을 새로 맡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 감사하는 잡지,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잡지, 대한민국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잡지를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