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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석 칼럼] 노벨상, 한국과 일본의 거리

최만섭 2015. 10. 10. 11:30

[강천석 칼럼] 노벨상, 한국과 일본의 거

 2014.10.10 22:54

일본 人名사전, 最長壽 총리 51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53줄
현재 우리 위치와 목표와의 거리 정확히 판단·측정해야

강석천 논설고문
강석천 논설고문

닿을 듯 말 듯 하다 다시 멀어지는 나라가 일본이다. 역사 갈등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라의 기초(基礎)가 얼마나 단단하냐에 관한 이야기다. 세계화·정보화 시대에선 과학의 수준이 나라의 수준이다. 한국인들이 10월만 되면 유독 심하게 노벨상 몸살을 앓을 법도 하다. 이웃 일본이 수상자(受賞者)를 낸 해에는 더하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은 일본 연구자 3명이 공동 수상했다. 일본의 세 쌍둥이 노벨상은 2008년 물리학상에 이어 두 번째다. 한·일 축구에 비겨 '19:0'이란 말도 나돈다.

노벨상이 과학의 성취 수준을 평가하는 표준 잣대(尺)는 아니다. 노벨상을 받은 위대한 과학자보다 노벨상이 비켜간 위대한 과학자 숫자가 몇십 배 많다. 그래도 속은 편치 않다. 노벨상 자연과학 부문 역대 수상자의 9할은 미국·독일·영국·러시아·프랑스·일본 출신이다. 노벨상 수상자 숫자와 그 나라 국력의 충실도(充實度) 사이의 상관관계를 부인할 수 없다. 영국 경제가 중병(重病)에 시달리던 시절 영국 경제학자가 잇따라 경제학상을 받자 다들 웃었다. 자연과학 부문은 다르다.

일본 노벨상 수상자의 모습은 2000년대 들어 크게 달라졌다. 과거엔 노벨상을 받았다 하면 교토대(京都大)거나 도쿄대(東京大) 졸업생이었다. '입학생 수능 점수는 도쿄대가 높은데도 노벨상과 마주치면 왜 교토대에 맥없이 무릎을 꿇나' 하는 게 TV 토크쇼의 단골 메뉴가 될 정도였다. 요즘은 확 변했다. 도쿄공업대·나고야대·도호쿠대·나가사키대·홋카이도대·고베대·도쿠시마대 같은 지방대 출신이 교토대와 도쿄대 출신을 합한 숫자와 맞먹는다. 과학 연구의 저변(底邊)이 그만큼 넓어졌다. 2002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최종 학력은 지방대 4년 졸업이다. 과학 부문 노벨상 100년 역사를 통해 첫 학사(學士) 수상자였다.

몰라서 그렇지 일본은 일찍부터 물리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나라다. 물리학자 유가와 히데키(湯川秀樹)는 전범(戰犯) 국가로서 패전의 잿더미에 파묻혔던 일본 국민에게 다시 일어설 의욕을 불어넣어준 인물로 꼽힌다. 외환위기 시절 종아리를 걷고 연못에서 샷을 날리던 박세리 선수 이상이다. 194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수상 대상은 1934년 27세 나이에 발표한 중간자 이론이었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일본을 현대물리학 선도(先導) 국가로 올려세운 공로자의 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일본 물리학의 위상(位相)이 그때 이미 높았다. 1920년대 현대물리학을 개척한 닐스 보어(덴마크·1922년 노벨상 수상)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독일·1932년 수상)의 전기에는 일본인 제자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근래 들어 화학 쪽으로도 뻗어간다. 물리학상 수상자 10명, 화학상 수상자 7명이 됐다. 일본은 화학 분야에선 전통적 강국이 아니었다. 일본 경제 전성기인 1970~1980년대 어느 산업 분야나 일본 1위 기업은 세계 랭킹 5위 안에 들었다. 그 예외가 화학과 제약(製藥)산업이었다. 늘 10위 언저리로 밀렸다. 첫 노벨상 수상도 1981년으로 물리학상보다 30년 뒤졌다. 2000년 무렵 도쿄공업대 출신 화학상 수상자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변했다. 일본 학계는 노벨화학상 예비 후보가 1개 분대(分隊) 정도 기다리고 있다 했다. 지금은 소대(小隊) 규모로 늘었을지 모른다.

일본 과학을 이야기하면서 이화학(理化學)연구소를 빼놓을 수 없다. 일본 과학을 이끈 선구자들은 대부분 청춘의 한 시절을 이 연구소에서 보냈다. 1917년에 설립됐다. 우리의 KIST와 비슷하지만 기초과학 연구에 중점을 뒀다는 게 다른 점이다. 명령을 통해 상하(上下)로 움직이는 일본 풍토와 달리 수평(水平)으로 움직이는 조직이라는 게 자랑이었다. 초대 연구소장의 연구소 운영 철학은 '자원 없는 나라가 자원 부국(富國)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과학'이라는 것이었다.

세계 어느 대도시나 번화가는 비슷하다. 골목을 봐야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어느 나라든 대표 기업의 겉모습은 비슷하다. 최종 판가름은 그 나라 과학의 전반적 수준에서 난다.

마음에 걸리는 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일본 반도체의 아버지라는 학자가 25년 전에 한 말이다. "일본 반도체의 전성기는 끝났다. 다음은 한국에 머물다 이어 중국·인도·동남아로 흘러갈 것이다. 그것이 산업 사이클(cycle)이다." 우리를 먹여 살려온 주력(主力) 산업들과 그것을 뒷받침할 한국 과학의 미래는 어떨까.

다른 하나는 일본 인물사전에서 드러나는 두 나라 가치관 차이다. 일본 총리로서 1964년부터 1972년까지 최장기 재임(在任)기록을 세운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에 대한 기록은 51줄이다. 일본 물리학의 개척자 유가와 히데키(湯川秀樹)에 대한 것은 53줄이다.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일본은 닿을 수 있는 나라이고 넘어설 수 있는 나라다.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우리 안에 함께 담겨 있다. 현재 우리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목표와의 거리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