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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훈 칼럼] 부잣집 문 앞에 선 월급쟁이의 선택

최만섭 2015. 10. 9. 12:03

월급쟁이 연봉 높다고 돈으로 살 수 없어
선진국 최종 관문인 '지식·경험' 재산 축적엔 越班도 지름길도 없다

양상훈 논설주간 사진
양상훈 논설주간
중동에 있는 초고층 건물을 우리 건설사가 지었다고 해서 그런 줄 알고 있었다. 국제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그 건물 건축 과정을 방송하길래 그 건설사 이름이 나오길 기대하며 보았다. 끝날 때까지 우리 건설사 이름은 정말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건물의 기초 개념 설계와 핵심 기술, 문제 해결 전부를 선진국 백인들이 한 것이었다. 이상해서 건설 회사에서 오래 일했던 분에게 물었더니 "우리 건설사는 공사 인부 모아서 선진국 전문가들이 하라는 대로 한 것"이라고 했다.

KFX(한국형 전투기) 개발에서 우리가 봉착한 문제도 다르지 않다. 미국이 주지 않는 네 가지 기술과 관련해 그 장비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기계 덩어리인 그 장비에 실제 생명력을 불어넣는 소프트웨어 기술이 없는 것이다. 전투기 소프트웨어 기술은 두바이 고층 건물 기초 개념 설계처럼 서양 백인들이 거의 독차지하고 있다. 선진국 보유 기술은 조건만 맞으면 한국 같은 외국에 팔 수도 있는 게 있고,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외국에 넘길 수 없는 것이 있다. 전투기 항전(항공 전자)은 후자 영역에 있다. 미국만이 아니라 어떤 유럽 국가도 마찬가지다.

초대형 건축물이나 스마트폰의 최초 개념 설계, 전투기 항전과 같은 절대 보호 기술은 선진국 국가 경쟁력의 결정체다. 달리 말하면 이 역량 여하에 따라 선진국이냐 아니냐가 갈린다. 우리는 그동안 선진국이 돈 받고 파는 기술, 이른바 범용 기술을 이용한 대량생산과 치열한 판매로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절대 이전 불가 기술'이라는 마지막 관문 앞에 서 있다. '선진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다' '수출이 준다' '늘 불경기다' '잠재성장률이 떨어져 난쟁이가 된다' '청년들 일자리가 없다'는 모든 고통이 결국엔 우리가 운명적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이 예정된 최종 관문 앞에서 겪는 성장통이다.

서울 공대 교수들이 쓴 '축적의 시간'에 따르면 선진국 절대 보호 기술은 어떤 비밀문서에 적혀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문서화할 수도 없다. 그 나라 인재들이 수십, 수백년간 대(代)를 이어가며 개인과 조직의 머리와 가슴에 체화한 유·무형 가치다. 세계적 거대 교량을 최초 개념 설계하는 서양 전문가들의 도구는 도화지와 연필 하나라고 한다. 중세에 대성당을 지을 때부터 전수돼온 유럽 건축 기술과 창의력의 정수는 그들 머릿속에 있다. 이런 기술은 그 기술을 보유한 회사를 사들여도 확보할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한다.

레이더와 같은 전투기 항전 장비를 구동하는 알고리즘(작동 방식)과 소스코드(프로그램)는 어떤 천재가 불현듯 무엇을 깨달아 나온 산물이 아니다. 수많은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서 그때마다 난관을 돌파하는 고통을 겪어가며 하나하나 쌓아올린 것이다. 미국 같은 초대국도 새로운 세대 전투기의 항전을 완성하는 데 10~20년 시간이 걸린다. 말하자면 선진국은 대대로 재산(stock)이 쌓인 부자이고 우리는 연봉(flow) 좀 받는 월급쟁이인 셈이다. '전에 없던 개념을 최초 설계하는 능력'이라는 재산은 가치 사슬의 제일 앞 단계에 있다. 이 재산이 있으면 엄청난 부와 기회, 권력이 줄줄이 달려나온다. 그 귀중한 재산을 돈 준다고, 동맹국이라고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만저만한 오산이 아니다.

범용 기술로 대량생산하는 데는 압축 성장도 있고, 월반(越班)도 있다. 그러나 경험과 지식을 축적해 창조적 개념 설계 능력을 갖추는 데는 압축도 월반도 있을 수 없다. 직접 해보며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지식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선진국이 된 나라는 하나도 없다. '축적의 시간' 저술에 참여한 서울 공대 멘토들은 근본적 가치를 가진 경험과 지식은 돈으로 살 수 없고 그 역량을 확보하는 데는 지름길이 없다는 사실을 빨리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문제는 우리에게 경험과 지식을 축적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은 시간 부족을 공간으로 극복하고 있다. 선진국이 100년 걸려 경험한 것을 10년간 10배 더 많이 경험해보는 식이다. 우리는 중국 같은 공간도 없다. 서울 공대 교수들은 '우리는 산업이 아니라 사회의 틀을 바꿔야 한다'고 답했다. 사회 인센티브 체계를 바꿔 모든 주체가 축적을 지향하도록 함으로써 축적의 범위를 산업만이 아니라 그 바깥까지 극적으로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한 분야에 인생을 바친 마이스터를 제대로 대우하고 사회 곳곳에 만연한 순환 보직을 폐지해 모든 곳에서 시행착오의 경험이 축적되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렇게 사회 전체가 일시적 총력 동원이 아니라 장기적 경험 축적 사회로 바뀌면 100년이 50년, 30년으로 줄 수 있다는 제언이다.

조선사들이 해양 플랜트로 엄청난 적자를 봤다. 너무 비싼 수업료를 내긴 했으나 거칠 수밖에 없는 경험과 지식의 축적 과정이기도 하다. 18조원 사업 KFX가 성공하겠느냐고 묻는다면 답할 수 없다. 다만 KFX를 하지 않으면 창조적 개념 설계를 할 수 있는 경험 축적 기회가 사라지는 것만은 분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