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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의 한국사] 길이 125m 달하는 백제 왕족들의 무덤… 서울서 발견됐죠

최만섭 2022. 3. 24. 05:19

[뉴스 속의 한국사] 길이 125m 달하는 백제 왕족들의 무덤… 서울서 발견됐죠

입력 : 2022.03.24 03:30

석촌동고분군(群)

 ①서울 송파구에 있는 석촌동고분군 4호분의 모습이에요. ②최근 발굴에서 출토된 금 귀걸이와 달개 장식이에요. 18k·21k 등 높은 순도를 자랑해요. ③화장 인골 파편. ④작은 단지처럼 생긴 흑색마연토기 표면에는 얇은 옻칠을 해서 광택을 냈어요. /한성백제박물관·고려대박물관
최근 한성백제박물관이 서울 송파구에 있는 석촌동고분군의 발굴 성과를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어요. 문화재 보존을 연구하는 '보존과학'이나 옛사람의 뼈를 연구하는 '고인골학(古人骨學)' 등 다른 학문 분야와 발굴된 각종 유물을 함께 연구했더니, 기존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밝힐 수 있었대요.

석촌동고분은 백제 한성(漢城) 도읍기(기원전 18년~기원후 475년)의 왕과 귀족의 무덤이랍니다. 잠실 롯데월드에서 직선거리 1㎞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한성기 백제의 왕릉군이 있다니 참 신기하죠. 석촌동고분군이 어떤 곳이고, 나온 유물에서 어떤 사실들이 밝혀졌는지 알아볼까요.

초기 백제의 왕궁과 무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시조(始祖) 주몽의 둘째 아들인 백제 시조 온조왕은 기원전 18년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고 해요. 당시 한강 유역에는 마한 54소국의 하나인 '백제국(伯濟國)'이라는 소국이 있었는데, 이곳을 정복하고 점차 주변 소국들을 병합해 백제(百濟)로 발전하게 됐지요. 오늘날 송파구 일원에 남아 있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바로 초기 백제의 왕궁이 있었던 곳이에요.

'석촌동(石村洞)'이라는 땅 이름은 '돌이 많은 마을'이라는 뜻의 '돌마리'에서 왔어요. 1910년대 석촌동 일대에 대한 조사를 할 때만 해도 약 300기의 무덤이 남아 있었지만, 대부분이 파괴됐어요. 1970년대 강남 개발과 잠실 지구 개발 사업을 하며 그중 일부를 발굴했는데, 토광묘와 옹관묘·돌무지무덤(積石塚·적석총)·돌방무덤(石室墳·석실분) 등 여러 형식의 무덤이 발견됐어요. 그중 가장 크고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돌무지무덤이에요.

주검 위에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드는 돌무지무덤은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부터 등장하지만, 고구려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이기도 해요. 고구려의 옛 도읍인 중국 지안(集安) 지역에는 지금도 수천 기의 돌무지무덤이 남아 있죠. 이 때문에 석촌동고분군의 돌무지무덤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백제가 고구려의 한 갈래에서 나왔다는 건국설화를 증명하는 자료로 생각되기도 해요.

싱크홀이 불러온 나비효과

석촌동고분군은 1986년 서울에서 열린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1988)을 계기로 석촌동 일대를 발굴·정비하면서 현재처럼 8기의 무덤만 남게 됐는데요. 그러다 2015년 4월 이 고분군을 관리하던 구청 담당자가 1호분과 2호분 사이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작은 구덩이를 발견했어요.

이 구덩이 크기는 지름 25㎝밖에 되지 않았지만, 백제 초기 왕릉군에서 발견된 만큼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긴급 조사를 하게 됐어요. 이것이 싱크홀(지반 침하 현상)인지, 도굴 구덩이인지 밝혀야 했기 때문이었어요.

조사 결과 과거 고분군 주변에 있었던 민가에서 설치한 우물이 갑자기 함몰해서 생긴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어요. 그런데 우물 벽면을 조사하다 보니 돌을 인위적으로 쌓은 석축과 점토를 단단하게 다져 올린 흔적이 드러났어요. 그 주변에서는 많은 백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 유리구슬 등이 함께 발견됐고요. 이를 계기로 주변까지 발굴 범위를 확장하게 되면서 1987년 마지막 발굴 이후 거의 30년 만에 석촌동고분군에 대한 정식 발굴이 시작돼 지난해 말까지 이어졌어요.

백제인의 화장 풍습

한성백제박물관의 최근 발굴 작업에서 드러난 가장 중요한 성과는 길이 125m·폭 60m가 넘는 대규모 '연접식 돌무지무덤'의 발견이에요. 기존에 알려진 석촌동 일대의 돌무지무덤은 각 무덤이 서로 떨어져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됐어요.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 16기 이상의 중소 규모 돌무지무덤들이 서로 맞붙어 하나의 거대한 돌무지무덤을 형성한 것이 밝혀진 거죠. 이 무덤들은 왕의 무덤이라기보다 왕족이나 귀족의 공동묘지로 추정돼요.

제사를 위한 목적으로 유물을 묻는 '의례 공간'을 별도로 마련했다는 점도 확인했어요. 이곳에서는 일부러 깨뜨린 토기나 기와 파편·금 귀걸이·유리구슬 등의 장신구와 함께 소나 말의 뼈, 잘게 부서진 인골 파편이 뒤섞여 나왔어요.

특히 4.3㎏이나 되는 인골이 나왔는데 이를 분석해 보니 600~700도 이상 고온에서 화장(火葬)한 다음 일부러 뼈를 부순 뒤 묻은 것이었어요. 한 장소마다 최소 2~3명의 인골이 섞여 있었고, 모두 합치면 적어도 12명이 화장된 것으로 추정돼요. 이곳에서는 불을 사용한 흔적이 드러나지 않아 다른 곳에서 화장한 뒤 뼈만 모아 안치했던 것 같아요. 시신을 불태워 장례 지내는 화장 문화는 불교가 도입되며 시작됐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백제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부터 이런 장례 풍습이 있었던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답니다.

공예품과 토기에 남겨진 백제문화

석촌동고분군에서는 금이나 은, 유리 등 장신구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토기도 다수 출토됐어요. 이런 껴묻거리(부장품)들은 죽은 사람이 저승에 가서도 살아생전처럼 생활하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넣어준 건데요.

그중 귀걸이나 달개장식 등은 18k·21k 등 비교적 높은 순도의 금을 사용했어요. 또 동그란 구슬 모양 장식은 금판 두 개를 반구형으로 만든 다음 땜질해서 붙인 것이었어요. 정교하고 수준 높은 백제 금속공예 기술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었죠.

표면이 검고 겉면을 반들반들하게 간 흑색마연토기(黑色磨硏土器)의 비밀도 밝혀졌어요. 작은 단지처럼 생긴 이 토기는 검은색을 띠며 표면에 광택이 나는 것이 특징이에요. 지금까지는 토기의 표면에 흑연이나 산화철과 같은 광물질을 바르고 목제 도구를 이용해 갈아서 광택을 낸 것으로 추정했어요. 하지만 현미경으로 토기 표면을 관찰해보니 표면에 얇은 옻칠을 해서 광택을 낸 것이었죠. 옻은 금보다 더 귀한 재료로 알려져 있답니다. 옻칠을 하면 벌레도 끼지 않고 윤기와 색깔이 은은해서 우아하고 깊은 맛을 내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검이불루·儉而不陋),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화이불치·華而不侈)"는 말은 흑색마연토기의 은근한 자태와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석촌동 3호분은 근초고왕릉일까]

석촌동고분군에서 가장 큰 3호분은 동서 50.8m, 남북 48.4m에 달하는데, 계단처럼 단을 이루며 현재 높이 4.5m 정도로 복원돼 있어요. 하지만 일제강점기 흑백사진을 보면 원래 높이 6m가 넘는 커다란 무덤이었던 것 같아요. 한 변의 길이가 33m인 고구려 장군총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거대 고분이라 할 수 있죠.

그 때문에 이 무덤은 한성기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사람이 많아요. 평양성을 공격해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인 근초고왕의 무덤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남아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요.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