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충신 기려 제사 지내고, 체육관에서 대통령도 뽑았죠
장충단
오는 9일은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선거일이에요. 우리나라는 지금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직접선거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72년 유신 헌법 때부터 1987년 제6공화국 헌법 이전까지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일부 사람이 대통령 선거를 했던 간접선거제였죠.
이 시기에는 투표가 체육관에서 이뤄지는 일이 많아 '체육관 선거'라고도 불렀는데요. 이 체육관은 바로 서울의 장충체육관이었습니다. 장충체육관과 그 주변인 장충단(奬忠壇) 일대는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될 만큼 역사의 희로애락이 서려 있는 곳이죠.
대한제국의 충신들을 기리던 장소
"갑오년(1894년) 이후로 전사한 사졸(士卒)들에게 미처 제사를 지내주지 못했으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원한 맺힌 혼령들이 의지해 돌아갈 곳이 없어 슬프게 통곡하는 소리가 구천에 떠돌지 않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1900년(광무 4년),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는 갑오농민운동(1894)과 을미사변(1895) 등의 국난을 거치며 희생된 군인과 충신들을 기리는 제단인 장충단을 남산 자락에 만들도록 지시했습니다. '장충'이란 '충신을 표창하고 기리다'는 뜻이에요.
장충단이 들어선 곳은 조선 후기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는 남소영이 있던 곳이었어요. 지금 이 지역의 '장충동'이란 이름은 바로 장충단에서 온 것이죠. 을미사변 때 경복궁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시위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때 희생된 사람들의 신위(신주를 모시는 자리)를 이곳에 마련하고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이름을 딴 절이 들어서다니
그러나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 침탈당하면서 장충단 일대의 성격은 크게 바뀌게 됩니다. 자신들의 침략을 은폐하기 위해 장충단을 없애 '추모 공간'의 기억을 지우고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들었던 거예요. 일제는 1920년대 이곳에 벚나무를 심은 뒤 야간 개장을 하고, 장충단공원행 전차까지 개통했어요. 그렇게 장충단은 많은 행락객이 찾는 유원지로 변질됐습니다.
장충단 훼손은 1932년 박문사(博文寺)라는 일본식 사찰이 이곳에 세워지며 정점에 달합니다. '박문'이라는 인물을 기념하기 위한 시설이었는데, 바로 조선 침략의 원흉이자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1841~1909)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조선을 침략하다 사망한 일본의 고위 인사와 군인의 위령제를 이곳에서 열었던 거예요.
일제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박문사를 짓기 위해 경복궁 선원전을 옮겨 승려들의 거처로 사용했고, 경희문 정문인 흥화문을 통째로 떼 와 박문사 앞문인 '경춘문'으로 둔갑시켰습니다.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이 열렸던 환구단의 석고전은 박문사의 종각 신세가 됐습니다.
1937년쯤 이곳에서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사건 하나가 있는데요. 훗날 국회의원을 지낸 종로 주먹패 김두한(1918~1972)이 혼마치(지금의 충무로)의 일본 야쿠자와 패싸움을 벌여 이겼다는 이른바 '장충단공원 혈투'입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었는지 실체가 불분명하고 대체로 '항일 투쟁이라기보다는 조폭 사이의 영역 다툼 정도였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이후 이 이야기가 윤색돼 민족적 울분을 달래준 것은 사실입니다.
정치 유세, 대통령 선거, 김일과 이만기까지
1945년 광복이 되자 장충단을 원상회복하려는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박문사는 철거됐습니다. 사라졌던 장충단비를 찾아 다시 세웠고, 이준 열사와 사명대사의 동상을 비롯한 여러 애국지사의 기념물을 건립하기도 했죠. 박문사 자리에는 나라의 귀빈을 모시는 영빈관이 들어섰다가 1979년 신라호텔이 세워지게 됩니다.
장충단공원은 대통령 후보 연설 같은 정치 유세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는데요. 1957년 정치 깡패들이 야당의 시국 강연회를 훼방 놓은 '장충단 집회 방해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가수 배호(1942~1971)는 1967년 '안개 낀 장충단공원'을 불러 크게 히트시켰습니다. '가버린 그 사람이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달래 가면서 떠나가는 장충단공원.'
일제가 공원 입구 공터에 만들었던 운동장 자리에는 1963년 한국 최초의 돔 구조 체육관이 세워집니다. 바로 장충체육관이에요. 1960~1970년대 '박치기왕' 김일의 프로레슬링이나 1980년대 여러 차례 천하장사에 등극했던 이만기의 씨름대회가 열리는 날엔 몰려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1966년 한국 복싱 첫 세계 챔피언이 된 김기수의 역사적인 경기도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졌습니다.
1972년 유신헌법이 제정된 뒤 장충체육관은 대통령 선거가 이뤄지는 장소가 됐는데요. 국민 선거로 선출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들이 장충체육관에 모여 대통령 투표를 했던 겁니다. 8대(1972~1978)와 9대(1978~1979) 박정희 대통령, 10대(1979~1980) 최규하 대통령, 11대(1980~ 1981) 전두환 대통령이 유신헌법에 의해 장충체육관에서 선출됐습니다.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한 12대(1981~1988) 대통령 투표 역시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였지만 투표는 장충체육관이 아니라 전국 투표소에서 이뤄졌고, 당선된 전두환 대통령의 취임식은 11대부터 장충체육관 대신 새로 지은 잠실체육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장충체육관은 시설 노후화 때문에 2012년부터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해 2015년 1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문을 열었죠. 지금은 프로배구 경기가 한창 벌어지고 있습니다.
☞흥화문(興化門)
경희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지어졌어요.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재위 1608~1623)이 처음 세운 대궐문인데, 경희궁은 왕이 유사시에 본궁을 떠나 거처하는 이궁(임금이 머물던 별도의 궁전)이었기 때문에 다른 궁궐 정문처럼 2층으로 짓지 않고 1층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원래 자리는 지금의 신문로 구세군회관 근처였습니다.
흥화문은 일제가 경희궁을 없애는 과정에서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장충단공원 옆 박문사로 다시 옮겨져 절 정문으로 사용되는 아픈 역사를 겪었습니다.
광복 후 박문사는 철거됐지만 흥화문은 이후에도 그 자리에 남아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쓰였습니다. 1988년 경희궁 일대의 복원 작업이 진행되면서 흥화문도 현재 자리인 경희궁 앞으로 옮겨졌습니다. 흥화문 옆 서울역사박물관 로비에서는 다음 달 24일까지 '장충단공원: 추모와 환호의 현장'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