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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의 新줌마병법] 소망식당, 4000원의 행복

최만섭 2022. 1. 25. 05:12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소망식당, 4000원의 행복

한 그릇에 4000원 우거짓국 팔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팔순 부부
하루 매상 2만원 안 될 때 많지만 “내일이 있잖여요, 내일이!”
비가 멎기를, 바람이 자기를 기다려 해를 보는 것이 소망이지요

입력 2022.01.25 03:00
 
 
 
 
 

한강 철교를 지난 열차가 영등포를 지나 남쪽으로 내달렸다. 꽝꽝 얼어붙은 하늘이 시리도록 파랬다. 도시의 속살은 낡고 추레했다. TV에선 스토킹 살해범에 관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들녘에 쌓인 잔설을 보다 깜박 졸았다 싶더니, 어느새 열차가 대전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내린 게 언제였던가. 그날 사람들은 대합실 TV 앞에 모여 있었다. 뒤통수에 ‘구루프’를 달고 출근한 재판관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선고문을 낭독했었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환호와 탄식이 엇갈리며 아수라장 된 5년 전 대합실은,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러스트=이철원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다. 지난가을, 행운의 클로버잎 두 장이 동봉된 편지가 배달됐다. 발신지가 대전 중구 대흥동의 작은 식당이었다. 1945년생 주인장은 장사를 끝낸 뒤 젖은 손을 마른 행주에 꾹꾹 눌러 닦고 식탁에 조선일보를 펼쳐 놓은 채 이 글을 쓰고 있노라 했다. 신문은 10년 전 두 내외가 식당을 개업하며 구독하기 시작했단다. 배우는 게 너무 많아 ‘신문은 선생님’이 됐다고 했다. 코로나로 저녁 장사를 접은 지 오래였다. 그날 매상이 1만6000원이었다고 썼다. 훤한 대낮에 가게 문 닫으며 헛헛하기 짝이 없는 마음을 눈물·콧물에 웃음소리 왁자한 당신 글이 달래준다고 했다. ‘까짓 장사가 좀 안 되면 워뗘, 내가 굶어죽냐, 내일이 있잖여 내일이’라고 외쳤다고도 했다. 그날로 답장을 쓴다는 것이 어영부영 해를 넘긴 탓에, 무작정 대전으로 나선 길이었다.

대흥동은 90년대만 해도 대전역을 중심으로 번창한 상권이었다. 도청이 이사간 뒤 쇠락했다가 젊은 예술가들이 원도심을 재생한다며 카페, 갤러리, 소극장을 열어 잠시 반짝하더니, 임대료가 치솟자 다들 썰물처럼 떠나갔다. 감염병까지 덮쳐 더욱 스산한 거리에, 소망식당이라고 쓴 간판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손님도 둘, 주인도 둘이다. 연탄난로에선 보리차가 끓고, 빈 테이블엔 조선일보가 놓여 있었다. 하루 장사가 끝나면 주인장의 낙이 되어줄 참이었다. 메뉴는 우거지국 한 가지. 배추겉절이와 깍두기가 함께 나왔다. 선지가 듬뿍 들어간 우거지국은 담백하고 고소했다. 주인 할머니는 여자 손님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보문산 오른 얘기를 나누는 듯했다. 편지에 동봉한 네잎 클로버도 보문산 둘레길을 걸을 때 발견한 것이라고 썼다. 아직 식사할 수 있죠? 한 청년이 숨을 몰아쉬며 들어섰다. 우거지국에 밥을 말아 뚝딱 비운 남자는 밥도 맛있지만 식당이 예뻐서 단골이 됐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흰 벽에 연필로, 물감으로 그린 그림들이 보였다. 신윤복 풍속화부터 최민식 사진까지 고금을 넘나든다. 꿈이 화가였던 할아버지가 신문에서 찾은 그림과 사진을 오려놨다가 열심히 모사해 완성한 ‘역작’이었다.

4000원. 여름에만 파는 냉콩국수와 보리밥도 4000원이란다. 이렇게 팔면 남는 게 없지 않냐고 묻자, 두 노인이 먹으면 얼마나 먹겠냐며 웃는다. 값을 치른 뒤, 실은 편지를 받은 김아무개라고 하자 노인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어떻게 여기까지…. 편지는 노부부가 함께 쓴 것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말하면 할아버지가 살을 붙여 적었단다. 밥은 굶어도 신문은 꼭 읽는다고 했다. 신문에 실린 사진과 달라 못 알아봤다고, 할아버지가 겸연쩍게 웃었다. 1시 반. 문 닫을 시간인데 연로한 손님이 오셨다. 동네 최고 어르신인데, 거의 매일 부부가 점심을 대접한단다. 후식으로 믹스 커피를 탔다. 세 노인이 커피잔을 부딪치며 외쳤다. 건강하세요! 떠날 채비를 하니, 할머니가 비닐봉지에 겉절이를 담는다. 이것밖에 줄 게 없어서…. 안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여름에 냉콩국수 드시러 오라며 할머니가 작은 손을 흔들었다.

다시 대전역. 코로나에도 어김없이 설은 오고, 노부부의 단골인 역전시장엔 왕대하와 미더덕과 꽃게가 넘쳐날 것이다. 대추·고사리·시금치·호박고지·무말랭이며, 김 모락모락 나는 두부와 동태포를 떠서 검은 봉지에 바리바리 싸서 돌아가는 여인들로 북적이리라. 대전역 가는 방향을 일러주러 따라나온 할아버지에게 새해 소망을 물었다. 작년, 작년에 작년 것이 금년의 소망이지요. 그것은 김광섭의 시에도 있어요. 시시하지요? ‘비가 멎기를 기다려/ 바람이 자기를 기다려/ 해를 보는 거예요’로 시작하는 김광섭의 ‘소망’은 ‘젊어서 크던 희망이 줄어서/ 착실하게 작은 소망이 되는 것이/ 고이 늙는 법이예요’로 끝난다. 광장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