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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 된 샤토에서… 메르켈 떠나보내는 마크롱의 특별한 만찬

최만섭 2021. 11. 5. 05:10

1000년 된 샤토에서… 메르켈 떠나보내는 마크롱의 특별한 만찬

마크롱, 와인 애호가 메르켈 위해 ‘부르고뉴 피노 누아’ 원산지로 초대

런던=정철환 특파원

입력 2021.11.05 04:29

 

 

 

 

 

임기 내내 가치를 공유하는 동반자로 우정을 나눴던 앙겔라 메르켈(오른쪽)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3일 프랑스 부르고뉴 본에 있는 ‘샤토 뒤 클로 드 부조’ 연회장에서 밝은 표정으로 마주보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임기 중 마지막으로 프랑스를 찾은 메르켈 총리를 위해 와인 명소인 이곳에서 특별한 만찬을 준비했다. /엘리제궁 공식 인스타그램

3일(현지 시각) 오후 5시 15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부부가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300여㎞ 떨어진 프랑스 와인의 중심지 부르고뉴 본(Beaune)의 한 광장에 나타났다. 두 사람은 미리 모여 있던 수천 명의 시민과 인사를 나누며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렸다. 15분 뒤 이날의 손님이 등장하자 광장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가득 찼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부부였다. 메르켈은 예상 밖 인파에 놀란 듯 멈칫했다가 이내 평소의 온화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이날 일정은 마크롱이 메르켈을 위해 마련한 ‘특별 이벤트’였다. 곧 총리직에서 내려와 정계를 은퇴하는 메르켈에게 이날 프랑스 방문은 총리로서 마지막 공식 방문이었다. 지난 16년간 독일과 유럽을 이끌어 온 그에게 기억에 남을 추억을 선물하려 메르켈 부부를 부르고뉴 피노 누아(Pinot Noir) 와인의 본산, 본으로 초청한 것이다. 프랑스 3TV는 “마크롱 대통령과 외국 정상의 만남은 파리의 대통령궁(엘리제궁)에서 하는 것이 관례지만 오늘은 엘리제궁이 본으로 옮겨왔다”며 “함께 유럽의 수많은 난관을 헤쳐온 프랑스 정상들과 메르켈 총리의 특별했던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했다.

메르켈 총리는 2005년 11월부터 만 16년간 재임하며 자크 시라크,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수아 올랑드, 마크롱 등 총 4명의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일했다. 시라크는 그에게 ‘손 키스’로 극진히 대하면서도 2005년 유럽 헌법 초안에 반대표를 던져 메르켈을 당황시켰다. 중도 우파인 사르코지와 메르켈은 2007년 시작된 글로벌 금융 위기를 맞아 정부 부채를 줄이기 위한 예산 안정(긴축) 협정을 함께 추진, 손발이 잘 맞는다는 평을 받았다. 올랑드와는 2015년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를 계기로 가까워졌다.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행사에서 올랑드에게 머리를 기대 그를 위로하는 메르켈의 사진은 1·2차 대전의 상흔을 뛰어넘은 양국의 긴밀한 관계를 상징하는 모습이 됐다. 1차 대전 동안 프랑스-독일 전선에서는 양국 장병 약 300만명이 사망했다. 2차 대전 때는 프랑스가 독일의 침공 40여 일 만에 항복하는 치욕을 당했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모든 것을 뒤바꾸려 했던, 젊고 성급한 나를 받아들이고 이해해줘 고맙다”고 했고, 메르켈은 “프랑스 대통령들과는 비록 처음에는 생각이 다르곤 했지만, 항상 같은 가치를 공유할 수 있어 좋았다”고 화답했다. 본 시민의 환대를 받은 두 정상은 광장을 가로질러 고딕 양식의 화려한 건축물로 유명한 이곳의 명물 ‘오스피스 드 본(Hospices de Beaune)’을 방문했다. 15세기 중반 부르고뉴 대공이 빈민을 위한 병원으로 지은 건물로 지금은 역사 박물관이다. 1993년 6월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헬무트 콜 독일 총리가 제63차 독일-프랑스 정상회담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오스피스 드 본을 둘러본 메르켈 부부와 마크롱 부부는 이 지역의 대표 샤토(Chateau·포도밭을 거느린 양조장)인 ‘샤토 뒤 클로 드 부조’로 자리를 옮겼다. 11세기에 처음 생겨 1000여 년간 포도를 길러온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곳 연회장에 메르켈을 위한 만찬이 차려졌다. 미슐랭 가이드에 등재된 이 지역 유명 레스토랑 ‘그뢰즈’의 스타 셰프 요한 샤퓌가 포도와 치즈, 송로버섯 등 부르고뉴 지역 특산물로만 꾸며진 정찬을 마련했다. 와인으로는 ‘생 오뱅 프리미에 크뤼’ 2015년산 백포도주와 ‘뉘상 조르주 프리미에 크뤼’ 2014년산 적포도주가 나왔다. 메르켈의 취향을 고려한, 부르고뉴를 대표하면서도 지나치게 비싸지 않은 와인들이었다.

마크롱은 이 자리에서 메르켈에게 프랑스 최고 훈장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를 전달하며 경의를 표했다. 그는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 그리고 오늘의 유럽은 당신의 헌신과 결단, 때로는 인내와 경청할 줄 아는 능력 덕분에 가능했다”면서 “언제까지나 우리의 친구로 남아달라”고 말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메르켈은 마크롱에게 포옹으로 답했다. 프랑스 BFM TV는 “오늘 행사는 유럽 정치사에서 유례가 없었던 ‘협력’의 한 시대가 지나고 있음을 의미한다”며 “재선을 향해 달리는 마크롱이 새 독일 지도자와 에너지 안보, 유럽 내 난민과 문화 갈등, 미·중 대결로 갈라진 세계 등 산적한 지정학적 문제를 어떻게 함께 풀어갈지 걱정이다”라고 했다.

 

 

런던=정철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