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장강명의 사는 게 뭐길래] “선하고 순수한 우리와 사악한 저들”

최만섭 2021. 8. 26. 05:13

[장강명의 사는 게 뭐길래] “선하고 순수한 우리와 사악한 저들”

“집값은 투기 때문, 그게 다 친일파 때문” 들을 땐 기분 좋겠지만
‘듣기 좋은 말’이 그들의 진짜 이념… 말한다고 다 사실 되진 않아
점점 힘 얻는 그들만의 가상현실… 실체는 지적 게으름과 비겁함

장강명 소설가

입력 2021.08.26 03:00

 

 

 

 

 

독자와의 만남이나 강연 행사를 마치고 나서 “말하는 모습이 부드러워서 놀랐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글로만 접했을 때에는 아주 차갑고 냉소적인 사람인 줄 알았다는 거다. 그럴 때면 “여기서 보여주는 모습은 연기이고, 글이 진짜 제 얼굴”이라며 웃으며 대답한다. 진담인데 다들 농담으로 받아들이신다.

처음에는 꽤 진지하게 고민했더랬다. 말이 느리고 눈매가 처진 덕을 보는 걸까? 내가 혹시 이중인격자일까? 요즘은 이것이 어떤 종류의 글을 정직하게 쓰려는 자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그 운명은 나라는 개인의 인격에 기인한 부분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말과 글이라는 의사소통 수단의 차이에서 나온다.

나는 신이 없다고 생각한다. 내세도 없고, 고로 사람이 죽으면 썩어서 냄새 나는 흙이 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말을 장례식장이나 예배당에서 하지는 않는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산다. 강연장에서도 그렇다.

이것이 기만인가? 위선인가? 나는 예의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의 존중과 지지를 간절하게 바란다. 그것을 얻지 못할 때, 경멸 어린 시선이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언행을 당할 때, 사람은 깊이 상처받는다.

/일러스트=이철원

그런 비참한 상황을 막고 존중을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고자 사회마다 독특한 규범을 개발했다. 예의다. 타인과 어떤 장소에 함께 있을 때 사용하는 언어와 행동에 제약을 가해 상대를 존중한다는 뜻이 드러나게 한다. 그런 제약의 형태는 임의로 만들어지는 것이어서 시대마다, 또 문화마다 다르다.

어떤 진실은 사람의 감정에 상처를 준다. 그 대상과 같은 시공간에 있을 때 우리는 불편한 진실에 대한 의무를 잠시 뒤로 미룬다. 병문안을 간 자리에서 환자가 자신의 체취를 걱정할 때,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라고 태연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한다.

한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약자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즉석에서 일종의 가면극을 함께 공연하기도 한다. 이는 쉽지 않은 기술이며, 때로 그런 노력은 아름답고 감동적인 광경을 연출한다(이런 ‘예의의 예술’에 관심 있는 분들께 김원영 변호사의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추천한다).

 

그러나 이는 특정한 장소와 맥락에서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일이며, 대부분의 시공간에서 우리는 거짓에 기대지 말아야 한다. 공론이 오가는 곳이라면 더욱. 공동체의 미래를 둘러싼 논의는 ‘들으면 기분 좋은 말’이 아니라 현실에 기반해야 한다. 간병인은 “아무 냄새도 안 난다”며 환자를 위로할 수 있다. 하지만 의사에게는 그 냄새를 알려야 한다.

나는 모든 글을 공론장에 제출한다고 생각하고 쓴다. 인간 본성과 세상의 시스템들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내가 믿는 바를 쓰면, 독자들은 그게 너무 어둡다고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냉소가 아니라 정직이다. 문학이 하도 시시해지다 보니 문학의 목적이 위로에 불과하다고 믿는 이들도 있지만.

그래서 나는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추구를 미심쩍게 바라본다.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 중 몇몇은 ‘더 배려하는 사회’를 넘어 예의를 우리 시대의 새로운 윤리로 격상시키려 한다. 그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 같은 다른 소중하고 섬세한 가치들을 우악스럽게 다룬다.

소셜미디어의 등장으로 말과 글의 경계가 불분명해졌고, 공론장과 사적인 공간의 벽도 허물어졌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좋은 말을 공론에 요구하며, 새로운 미디어 기술이 나오면서 그런 말만 골라 들을 수도 있게 됐다. 끝내 ‘현실이 아니지만 듣기 좋은 말’들이 공론의 일부가 됐다.

한국 사회의 많은 좌절이 친일파 때문이고, 부동산 가격 급등은 일부 투기 세력 때문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나의 불행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니까.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어서, 이런 잘못된 진단을 바탕으로 정책을 짜면 큰 부작용이 따라온다.

불행히도 그런 가상현실을 선호하는 사람이 점점 더 힘을 얻는 중이다.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그렇다. 이들이 외치는 구호는 나라에 따라 달라서 어디서는 좌파, 어디서는 우파로 불리는데, 실체는 지적 게으름과 비겁함이다. ‘선하고 순수한 우리와 사악한 저들’이라는 듣기 좋은 말이 그들의 진짜 이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