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아무튼, 주말] 잘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정치적 동물’이 되어라

최만섭 2021. 8. 14. 11:38

[아무튼, 주말] 잘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정치적 동물’이 되어라

[김영민의 문장 속을 거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정치 외면하면 쓸모없는 인간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입력 2021.08.14 03:00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1510~1511). 정중앙에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인물이 플라톤, 땅을 향해 손바닥을 펴고 있는 이가 아리스토텔레스다. /바티칸 박물관

“정치 공동체는 자연의 산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본성상 정치적 동물이다. 우연이 아니라 본성상 정치 공동체가 없어도 되는 존재는 인간 이상이거나 인간 이하이다.”

“인간은 본성상 정치적 동물이다.”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보았을 문장이다. 사회학과 수업에서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했을 수도 있고, 정치학과 수업에서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했을 수도 있다.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 <정치학>에 나오는 “ho anthropos phusei politikon zôon estin”이라는 표현을 번역한 말이다.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같은 말도 의미가 달리 전달된다는 것을 의식한 나머지, 중세 유럽 사람들은 “인간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동물이다”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이 말은 수천 년에 걸쳐 다양하게 해석됐다. 그만큼 그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기도 쉽지 않다. 정치가 권력에 눈먼 사람들이 해대는 더러운 짓거리 정도로 간주되곤 하면서, ‘정치적 동물’이란 말이 자기 이익을 위해 모략이나 협잡을 일삼는 존재라는 뜻으로 사용될 때도 있다. 그러나 원래 맥락을 감안하면, 저 말은 인간이 권력에 굶주린 음흉하고 전략적인 존재라는 뜻은 전혀 아니다. 인간은 본성상 홀로 살 수 없기에, 일정한 집단을 이루어 공적인 일에 종사하게끔 되어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나는 산속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이렇게 말해 보았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대단한 반론이 되지 못한다. 본성상 그렇게 하게끔 되어 있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본성상 음식을 먹게 되어 있지만, 단식을 할 수도 있고, 먹은 이상 배설을 하게 되어 있지만 용변을 참는 사람도 있고, 엄청나게 좋은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공부를 하지 않을 수도 있고, 변강쇠와 옹녀처럼 정력이 좋아도 평생 수절할 수도 있다. 본성이라고 해서 꼭 실현되리란 법은 없다.

그러나 현자들은 말한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운명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 파괴적이 되고 만다고. 단식을 거듭하다가 거식증에 걸릴 수도 있고, 용변을 자주 참다가 변비에 걸릴 수도 있고, 성교를 기피하다가 평생 성욕과 불화할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맞는다면, 인간은 집단 생활을 하는 것이 좋고, 집단 생활을 하는 것은 곧 자기 운명을 사랑하는 일이다.

왜 인간은 집단 생활을 하게끔 되어 있나? 일단,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세의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왕국론>에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자연은 즉각적으로 먹을 음식, 보온용 털, 살아남기 위한 방어 수단을 동물에게 주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인간은 그와 같은 것들을 혼자 마련할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은 여러 사람 속에서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인간은 집단 생활을 통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을 원죄를 가진 한심한 존재, 구원받아야 하는 타락한 존재로 본 많은 중세인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이 제법 ‘잘’ 살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집단 생활을 통해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생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더 ‘잘’ 살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정치, 즉 공동의 삶을 위한 모색에 참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그런 일이야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식욕이 넘쳐도 먹을 걸 구하지 못할 수 있고, 성욕이 넘쳐도 성교 상대를 구하지 못할 수 있듯이. 정치 참여의 기회를 얻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정치 참여를 못 했다고 해서 사람이 갑자기 죽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다만 ‘잘’ 사는 데 지장이 있다. 자신의 본성이 충분히 실현되지 않는 것이다. 엄청난 근육을 가진 사람이 무거운 물건을 들어볼 기회가 없이 살다 죽는 것처럼. 엄청난 춤 실력을 가진 사람이 한 번도 무대에 오르지 않은 채 죽는 것처럼.

 

집단 생활을 한다고 누구나 다 어엿한 정치적 동물이 될 수 있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군집 생활을 하는 동물은 인간만이 아니다. 개미도, 불개미도, 개미핥기도, 다 군집 생활을 한다. 인간이 개미, 불개미, 개미핥기 이상인 까닭은 인간이 말을 사용한다는 데 있다. 인간은 칭얼댈 때, 하소연할 때, 헛소리할 때, 신음할 때, 술주정할 때, 협박할 때도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정치적 동물로서 인간이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옳고 그른 것을 판별해가며 말을 한다는 것이다. 침 튀기며 그냥 막말을 해댄다는 것이 아니다. 옳고 그른 것을 판별해가며 말을 하지 않는 한, 그는 아직 어엿한 정치적 동물이 아니다.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견지에서는.

 

옳고 그름을 따져 가며 말을 할 줄 안다고 해서 곧 인간이 정치적 동물로서 자아실현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를 고민할 정도로 여유가 있어야 한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말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염두에 둔 정치 공동체는 폴리스라는 도시국가였다. 그곳에서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창틀에 쌓인 먼지 닦고, 화장실 묵은 때 벗겨내고, 욕실의 곰팡이 걷어내는 일 같은 것은 여자와 노예들에게 주로 맡겨졌다. 그리하여 여유가 생긴 그리스 남성은 정치 같은 공적인 일에 대해 비로소 논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대는 갔다. 인간이라면 대개 이 시시콜콜한 생활의 잡무와 싸워야 한다. 그러다 보면 지치게 되고, 지친 상태에서는 정치는 사치스러운 일로 보이기 쉽다. 정치 참여? 난 좀 쉬고 싶은데?

 

폴리스는 어디 한구석에 틀어박혀 은거하기에는 너무 소규모 사회였다. 그러나 인구 천만이 넘는 현대 도시와 국가에 살면서 익명으로 숨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정치는 권력욕을 주체 못 하는 중늙은이들에게 맡겨 놓고, 애착 인형을 끼고 그저 숨이나 쉬고 있기란 얼마나 편한 일인가. 짙어진 풀냄새를 맡으면서 아무도 없는 산책길을 고적하게 걷는 일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조용히 은거하면서 자기 삶의 안위와 쾌락만 도모하다가 일생을 마치는 일은 얼마나 유혹적인가. 그러나 폴리스 시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 아테네 사람들은 공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초탈한 사람이라고 존경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으로 간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