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백영옥의 말과 글] [215] 다가오는 것들

최만섭 2021. 8. 28. 09:27

[백영옥의 말과 글] [215] 다가오는 것들

백영옥 소설가

입력 2021.08.28 00:00

 

 

여름에서 가을,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무렵 영화 ‘다가오는 것들’을 본다. 나로선 겨우 핀 꽃이 이내 지거나, 풍성한 나무들이 순식간에 빈곤해지는 걸 보며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제자를 사랑하게 됐다는 남편의 고백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내 예상을 깨고 그 누구도 다치지 않는다. 더 흥미로운 건 이별 후 새 자아를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그 길 위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등의 스토리는 없다는 것이다. 대신 철학 교사인 주인공은 되뇌인다.

 

“20년 동안 남편과 나는 브람스랑 슈만만 들었어. 지긋지긋해. 이런 생각을 해. 애들은 떠나고, 남편은 가고, 엄마는 죽고, 나는 이제 자유를 되찾은 거야.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완벽한 자유.”

 

갑자기 찾아온 자유는 역설적으로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안전하지만 자유로운 직장이 없는 것처럼 자유와 안전은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탈리는 불안함 때문에 섣불리 연민에 빠지거나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오래 가꾼 별장 정원에서 새로 사귀었다는 여자가 꽃을 좋아하길 바란다는 그녀의 말에 손사래 치는 남편에게 말한다. “안 그러면 정원이 아깝잖아...당신은 바뀐 게 없는 것처럼 말하네. 정신 차려!” 나는 감히 이것이 어른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이 칼럼에서 나 자신을 몸무게나 나이, 키로 정의하지 말고, 방에 걸린 그림, 연주할 수 있는 악기, 평생 읽어온 책으로 규정해보자고 제안했었다. 영화 속 주인공의 손에 스마트폰처럼 들려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책이다. 자신을 바꾸지 않고 보존하는 것으로 생의 위기를 묵묵히 견디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상실을 ‘잃는 것’이 아닌 ‘얻는 것’, 즉 자유로 연결하는 힘 말이다. 스티브 잡스가 말한 ‘connecting the dots’(점을 연결하라!)는 실용서의 단골 인용 문구지만, 나탈리에게 이 말은 책 속에 존재하는 스승들의 가르침이었다. 스피노자, 루소, 에픽테토스의 철학은 이때 삶의 가장 위대한 실용이 된다.

#백영옥의 말과 글#읽어주는 칼럼

 

백영옥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