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쑥·마늘만 먹은 곰처럼 배우 되려 15년 버텼죠

최만섭 2021. 7. 20. 04:08

쑥·마늘만 먹은 곰처럼 배우 되려 15년 버텼죠

작년 이해랑연극상… 연극 ‘분장실’ 주연 서이숙

박돈규 기자

입력 2021.07.20 03:00

 

 

 

 

 

당신은 TV 드라마 ‘부부의 세계’나 ‘호텔 델루나’로 이 배우를 기억할지 모른다. 고교(연천 전곡고) 때 배드민턴 선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연극 ‘분장실’에 출연하는 서이숙(55)을 지난 15일 대학로 어느 극장 분장실에서 만났다. 배우로 활짝 꽃피운 현재부터 셔틀콕을 치고 받던 과거까지 그녀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지난 15일 서울 대학로 한 극장 분장실에서 만난 배우 서이숙은 "뭔가 이루고 나니 자신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제 연기가 뻔한 게 저한테 보이니 자신감을 잃었어요. 요즘엔 연기를 하려고 하지 말고 이야기와 인물을 잘 전달하자는 마음으로 접근합니다." /김지호 기자

분장실은 입구이자 출구다. 배우는 무대에 오르기 전 분장실 거울 앞에 앉아 얼굴을 꾸미며 자기 몸에서 벗어나 타인이 된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연극이 끝나면 다시 분장실에서 얼굴을 지우며 자신으로 돌아온다.

“극장에 처음 들어갈 때 무대부터 보는 배우와 분장실부터 보는 배우가 있어요. 저는 전자예요. 무대가 풍기는 퀴퀴한 냄새가 좋았어요. 극장마다 달라 묘한 흥분을 일으켜요. 마당놀이로 유명한 극단 미추 시절엔 (윤문식·김종엽·김성녀 등) 선배가 즐비해 저는 분장실에 자리가 없었어요. 바로 튀어나갈 수 있게 문간에 앉곤 했지요(웃음).”

수원에서 사회체육(배드민턴) 코치로 일하던 서이숙은 “지루해 때려치우고” 지역 극단에 들어갔다. 포스터를 붙이며 연극을 배웠고 대한민국연극제 연기상을 받곤 상경했다. 1989년부터 미추에 몸담았는데 연기가 아니고는 살길이 막막했다. 당시 어머니가 했다는 말. “여기서 결혼해 봐야 남자 ‘빤쓰’나 빤다. 너 하고 싶은 거 해. 대신 뒷바라지는 못 한다!”

서이숙은 별명이 ‘트롯 진(眞) 메이커’다. 중앙대 국악과 강사일 때 송가인을 가르쳤고, 임영웅 부친과는 중고교 동기다. "영웅이 아빠는 10대 시절에도 '배신자'를 멋지게 부르던 실력자였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이를 악물어야 했다. 후배 손현주·이원종 등이 TV나 영화로 떠날 때 서이숙은 버텼다. “배우가 되겠다고 ‘쑥과 마늘만 먹으며’ 견딘 15년이었어요.” 2003년 ‘허삼관 매혈기’로 첫 주역을 맡자 히서연극상·동아연극상이 그녀를 호명했다. “완전 이쁘거나 완전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아니니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요행을 바라진 않았어요. 인생은 투자한 시간만큼 결과가 나온다고 저는 생각해요. 3년만 더, 3년만 더, 3년만 더 하면서 버텼지요.”

‘고양이 늪’ ‘고곤의 선물’ ‘오이디푸스’···. 배우로 주목받던 2011년 시련이 들이닥쳤다. 갑상샘암. “인생 참 웃기죠? 저만치 정상이 보이는데 목소리가 안 나왔어요. 무대에 설 길이 막혔던 그때 다른 길이 열렸어요. TV 연기를 시작했고 배역이 점점 커지고 ‘신 스틸러’ 소리를 듣고···. 인생은 좀 풀린다고 낙관할 것도 없고 꼬인다고 낙담할 것도 없어요.”

 

오늘의 서이숙이 되기까지 배드민턴도 지분이 있다. 거울 속 자신을 흘끔 바라보며 배우가 말했다. “사물을 상상하며 던지고 받는 연기 훈련이 있어요. 저는 숱하게 셔틀콕을 받아봤잖아요. 상대의 말과 행동이 어떤 방향과 속도, 무게로 날아오는지 끝까지 보고 반응하는 습관이 몸에 배 있었던 거예요. 경험은 전부 자산이 돼요. 배우는 삶을 무대에서 연기하는 존재니까.”

배드민턴 셔틀콕. 서이숙은 셔틀콕을 치고 받던 선수 시절처럼 상대 배우의 말과 행동을 끝까지 보고 연기를 한다. /위키피디아

서이숙은 송곳 질문도 가볍게 받아냈다. ‘악역에 특화돼 있다’는 평가에 대해 “싫지만 수긍한다”며 덧붙였다. “스타일이 뚜렷한 배우도, 생활 연기를 잘하는 배우도 필요하잖아요. ‘나를 한쪽으로만 기용하더라도 완벽하게 해내자’로 마음을 바꿨더니 편해요. 언젠가 반대쪽 기회도 올 거라고 믿어요. 이숙아, 지금은 분장실 말석에 있지만 언젠가 칸 영화제도 가고 아카데미도 가자! 하하하.”

‘분장실’(8월 7일부터 대학로 자유극장)은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가 공연 중인 극장의 분장실에서 펼쳐지는 연극이다. 네 배우가 배역에 대한 갈망, 삶에 대한 회한 등 사연을 풀어놓는다. 서이숙은 바라던 배역을 평생 못 해보고 죽어 분장실에 눌러앉은 배우(귀신)를 연기한다.

“저도 미추 시절엔 ‘키(168cm) 크고 목소리 크고 중성적’이라며 남자를 많이 맡았어요. 이 연극을 보면 거울처럼 우리가 사는 모습이 비칠 거예요. 못 가져서 괴로워하는 사람, 가지고도 더 가지려는 사람, 죽어서도 발버둥치는 사람···. 배우는 이 인물 저 인물 세 들어 사는 존재지만 어떤 배역이든 만날 땐 내 모든 것을 주고 싶어요. 애정이 클수록 끝나고 여운이 길지만, 다른 인물을 만나는 순간 싹 지워지죠. 뜨겁게 사랑하고 뜨겁게 이별하자! 제 철칙입니다.”

연극 '분장실' 포스터. 지난해 이해랑연극상을 받은 배우 서이숙 외에 배종옥, 정재은, 황영희 등 연기 고수들이 출연한다. 서이숙은 "관객은 위로받고 싶어 극장에 오실 텐데 요즘엔 오히려 제가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박돈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