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무대 위 인문학] 건달·목사·영감… 혼자 32역하는 1인극도 있어요

최만섭 2021. 7. 19. 04:21

[무대 위 인문학] 건달·목사·영감… 혼자 32역하는 1인극도 있어요

입력 : 2021.07.19 03:30

모노드라마의 세계

 배우 김성녀씨가 ‘벽 속의 요정’에서 열연하고 있어요. 이 작품에서 김씨는 혼자 32역을 했어요. /의정부예술의전당

지금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모노드라마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어요. 28일까지 총 네 편의 연극 작품이 무대에 오르는데, 모두 단 한 명의 배우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무대를 지키는 연극이에요. 이런 연극을 1인극, 즉 모노드라마(monodrama)라고 부르죠. 모노드라마는 '모놀로그(monologue·독백)'와 '드라마(drama·희곡)'를 합한 단어예요. 여러 배우가 등장하는 연극에 비해 자칫 지루하거나 심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숨겨진 매력이 있답니다. 오늘은 모노드라마의 세계에 대해 알아봐요.

'모노오페라'로 시작했어요

최초의 모노드라마는 어떤 작품일까요? 프랑스의 정치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장 자크 루소가 작곡가 호라스 쿠아네와 함께 쓴 오페라 '피그말리온'이 모노드라마의 효시예요. '사회계약론'과 '에밀'의 저자로 유명한 루소는 오페라 대본을 직접 쓸 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어요. '피그말리온'은 배우 혼자 극을 끌고 가면서 노래했던 '모노오페라'였어요. 그런데 배우 한 명이 등장하는 형식이 음악보다 드라마가 중심이 되는 연극 무대에서 많이 활용되면서 지금은 '모노드라마'가 더 많고 사람들에게 익숙하죠.


루소의 '피그말리온'은 1770년 4월 19일 프랑스 리옹의 시청에 딸린 소극장에서 초연됐어요.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지중해 키프로스섬의 피그말리온 왕을 소재로 한 이야기예요. 피그말리온 왕은 직접 조각한 아름다운 여인상과 사랑에 빠지는데, 그 조각상이 사람으로 변신해 왕과 결혼한다는 이야기예요. 이 공연은 대단한 성공을 거둬서 독일·이탈리아·스페인까지 순회공연을 하며 관객몰이를 했습니다. 이후 모노드라마는 크게 유행을 했어요. 18세기 독일에서만 30여편의 모노드라마가 제작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죠.

당시 모노드라마는 지금과는 형식이 달랐어요. 음악 반주에 맞춰 합창대가 줄거리를 노래하고, 배우는 말없이 몸짓으로 공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죠. 모노드라마로 유명한 작품은 러시아 희곡 작가이자 단편 소설 작가 안톤 체호프의 '담배의 해독에 대하여'(1886)가 있어요. 이 작품은 여자 기숙학교 교장의 중년 남편이 등장해 신변잡기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힘들었던 결혼 생활까지 털어놓는 작품이에요. 배우와 관객이 오랜 친구처럼 마주 앉아 배우의 이야기를 들으며 몰입하게 되는 이 연극은 1인극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대표작이에요. 1959년 초연한 장 콕토의 '목소리'도 유명하답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전화로 작별을 전해 들은 여 주인공이 고통을 노래하는 작품이에요.

모노드라마 유행 만든 '빨간 피터의 고백'

한국 연극 최초의 1인극은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라는 작품이에요. 하반신 불구인 아내를 둔 남편의 자유로운 상상과 환상을 그려낸 이 작품은 1969년 서울 충무로에 있는 소극장 겸 다방 까페떼아뜨르에서 초연된 후 큰 화제를 모으며 실험극장(1960년 창단해 한국 연극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극단 '실험극장'이 운영한 극장)에서 재공연까지 하게 됩니다.


그런 모노드라마는 1970년대 후반 전성기를 맞았어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각색한 '빨간 피터의 고백'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부터예요. 이 작품이 워낙 큰 인기를 끌어서 당시 연극팬들에게 모노드라마가 아주 친숙하게 받아들여질 정도였답니다. 이 작품은 연기파 배우 추상미의 아버지인 추송웅이 자신의 연극 인생 15년을 기념해 1977년 삼일로창고극장 무대에 올린 작품이에요. 넉 달의 장기 공연 동안 관객 6만명 동원이라는 대단한 기록을 세웠죠. 아프리카 밀림에서 잡혀와 서커스 스타가 된 원숭이 빨간 피터가 학술원에서 인간 세계에 정착하게 된 과정을 보고하는 이 작품은 추송웅 배우의 열연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어요.

한 명의 배우가 여러 사람의 역할을 맡는 모노드라마도 있어요. '벽 속의 요정'이 대표적이랍니다. 스페인 내전 당시 30년간 벽 속에 숨어 몸을 숨기고 살았던 아버지의 실제 삶을 딸이 소설로 쓴 것을 일본 작가 후쿠다 요시유키가 희곡으로 각색한 작품이에요. 이 작품에서 김성녀 배우는 혼자 무려 32역을 해내요. 다섯 살 아이부터 목사·경찰·건달·영감까지 홀로 소화하며 무대를 장악하는 연기력은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지요.

연극 근원에 가장 맞닿은 형식

사실 배우에게 혼자 관객과 마주해야 하는 1인극 무대는 두렵고 힘든 도전과도 같습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여야 하기 때문이에요. 특히 독백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역량을 집결해야 하는 숙련된 연기 방법이에요. 긴 독백을 하면서 관객과 만나야 하는 배우에게 모노드라마는 자기 연기를 평가받는 시험대이자, 그만큼 큰 희열을 맛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연극의 기원은 기원전 그리스에서 신을 향해 지낸 제사 의식에서 찾을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최초의 배우는 제사 의식을 집행했던 한 명의 사제였을 거예요. 그래서 모노드라마는 연극의 근원에 가장 맞닿아 있는 무대라고 할 수 있답니다.

[대화·독백·방백]

희곡에서 대사는 말하기 방식에 따라 대화·독백·방백으로 나누어집니다. 대화가 둘 이상의 등장인물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이라면, 독백과 방백은 서로 주고받는 말이 아니라 혼자 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달라요. 그중 독백은 상대방 없이 혼자 하는 대사이고, 방백은 다른 인물이 무대 위에 있지만 그 인물에게는 들리지 않고 관객에게만 들리는 것으로 약속된 대사를 의미하죠. 관객은 배우가 방백을 할 때 다른 배우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연극을 관람해요.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모노드라마 작품‘담배의 해독에 대하여’의 한 장면. /시드니 페스티벌

 1970년대 후반 모노드라마를 유행하게 만든 배우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블로그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