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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내가 왜 화이트 와인만 마시는 줄 아니?”... ‘찐친’만 아는 그녀의 매력

최만섭 2021. 5. 1. 08:07

“얘, 내가 왜 화이트 와인만 마시는 줄 아니?”... ‘찐친’만 아는 그녀의 매력

[아무튼, 주말] 정치인부터 건축가까지
‘올드 보이’가 본 윤여정

김미리 기자

입력 2021.05.01 03:00 | 수정 2021.05.01 03:00

 

 

 

 

 

 

지난 25일(현지 시각) 아카데미 시상식 직후 윤여정이 로스앤젤레스(LA) 한국 총영사관에서 기자 간담회를 하는 모습. 한쪽엔 오스카 트로피, 다른 한쪽엔 화이트 와인을 뒀다. / KBS 유튜브 화면

“겉까속따(겉은 까칠해 보여도 속은 따뜻한 사람)” “전무후무한 매력덩어리” “믹스 앤드 매치(섞어 입기) 달인”…. ‘오스카의 여인’ 윤여정(74)의 오랜 지인들에게 ‘인간’ 윤여정을 물었더니 돌아온 수식이다.

세상은 일흔넷 배우에게 이제야 풍덩 빠져 호들갑 떨지만, 40~50년 ‘절친’들은 그의 매력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란 걸 안다. 솔직 담백한 윤여정표 화법에 익숙한 이들은 “윤여정이 밥 자리에서 수다 떠는 모습과 똑같아” 아카데미 수상 소감이 더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 교유(交遊)하며 한발 앞서 윤여정의 진면목을 알아본 ‘올드 보이'들의 얘기를 들었다. 베테랑 정치인부터 젊은 건축가까지 ‘윤여정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상을 타서 하는 칭찬이 아니라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신세 지고는 못 사는 ‘왕깔끔 여사’

50여 년 인연의 정대철(77) 전 국회의원은 윤여정더러 “깔끔함 그 자체”라고 했다. 아내가 신문에 난 기사를 스크랩해 윤여정이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건네줄 정도로 내외가 윤여정과 각별하다. “내가 미주리대에서 유학하고 있던 1970년대 중반 윤여정과 조영남이 시카고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 첫날 우리 집에서 묵었어요. 둘한테 안방을 내주고 우리는 애들 방으로 쫓겨났죠. 다음 날 외출하고 왔더니 윤여정이 우리 애들을 싹 다 목욕시켜 놨더라니까. 죽어도 신세 지고는 못 사는 깔끔한 성격이야(웃음).”

정 전 의원은 미국에서 ‘주부’ 윤여정이 지어 내준 집밥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1980년대 다시 미국에 공부하러 갔을 때 플로리다에 있던 윤여정 집에서 밥을 많이 얻어먹었다. 요리 솜씨가 여간 좋은 게 아니다. 두부찌개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며 “못하는 게 없는 팔방미인”이라고 했다. 윤여정은 아이들에게 큰삼촌 같은 존재라면서 정 전 의원을 ‘큰아재’라 부르곤 했다.

2년 전쯤부터 그가 좌장이 돼 한 달에 한 번쯤 이장희, 윤형주, 김세환, 송창식 등 조영남을 뺀 쎄시봉 멤버, 성우 송도순과 함께 윤여정을 만난다. “한번은 윤여정이 얼(큰아들)이 늘(작은아들)이가 몰래 아버지를 만난 걸 알게 돼 속상해서 울었다고 하더군요. 자존심 세서 힘든 내색 절대 안 하는 사람인데 맘고생 많이 했구나 싶었지요.”

“찬바람 쌩쌩 부는 차가운 여자 같지만 알고 보면 의리파”라고도 했다. “수십 년 전 종로에서 국회의원 나가면서 평창동 살던 윤여정하고 김수현 작가한테 좀 도와달라고 했어요. 둘이 까칠하게 말하더라고. ‘어우~, 정치 얘기하니 벌써 덥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소리 소문 없이 많이 도와줬더라고요. 은근히 의리파예요.”

1980년대 후반부터 알고 지낸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도 윤여정의 ‘의리’를 말했다. 그는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진국 같은 사람”이라며 “전 세계인이 보는 아카데미 무대에서 첫 감독인 김기영 감독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서 역시 의리 있는 배우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김 전 위원장은 1997 년 부산영화제에서 ‘김기영 감독 회고전’을 열어 김 감독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떨어지면 전화해달라”는 쿨한 여배우

“유머 죽여주지, 감각 끝내주지. 전무후무한 캐릭터라니까요.” 가수 김수철(64)은 윤여정을 “매력 덩어리 누나”라고 했다. 1970년대부터 알고 지낸 두 사람은 누나 동생 하는 사이다.

절친의 눈에 포착된 디테일이 있었다. 시상식 후 로스앤젤레스 한국 총영사관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윤여정은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답변했다. 김수철이 기자에게 물었다. “누나가 원래 화이트 와인만 마셔요. 왜 그런지 아슈?” 머뭇거리자 김수철이 최근 ‘휴먼여정체'란 닉네임을 얻은 윤여정 특유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누나가 전에 이유를 말하더라고요. ‘얘, 내가 그래도 명색이 여배우잖니. 레드 와인 먹고 입술 시커멓게 묻히고 다니면 되겠니?’ 하하!”

알고 지낸 지 50년 넘은 김동건(82) 아나운서도 윤여정의 위트를 인정했다. 윤여정은 과거 인터뷰에서 김 아나운서의 권유로 배우 길로 들어섰다고 밝혔다. 대학(한양대 국문과) 1학년 때인 1966년 학비를 벌려고 방송국에 아르바이트하러 갔다가 홍두표(현 TV조선 회장) 당시 TBC 편성부국장 눈에 띄어 김동건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진행 도우미로 출연했다. 그때 김 아나운서가 “이왕 TV를 하려면 탤런트를 해보라”고 해 TBC 공채 시험을 쳐 3기로 합격했다고 한다. 정작 김 아나운서는 “오래전 윤여정씨가 그 말을 해줬는데 너무 옛날이야기라 기억이 안 나더라”고 했다.

 

“아카데미 시상식 전날 문득 인연을 떠올리니 감회가 새롭더군요.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에 윤여정씨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신호가 한 번 울리자마자 받았어요. 평소하고 너무 똑같아 아카데미상 후보가 된 사람 맞나 싶더라고요. 흥분한 건 오히려 나였답니다. 수상하면 축하 전화도 하겠다고 했더니 윤여정이 그래요. 떨어지면 전화해달라고. 보통 반대 아닌가요? 참 윤여정답다 싶었지요(웃음).”

윤여정에게 진행 도우미 기회를 준 홍두표(86) TV조선 회장은 “50여 년 전이라 그때 기억은 안 나지만, 신인 시절 모습은 생각난다”고 했다. “눈이 유난히 초롱초롱한 친구였어요. 이번 시상식 때 보니 그 눈빛이 그대로 남아 있더군요. 윤여정이 어떤 태도로 인생을 살아왔는지 보이는 듯했습니다.”

◇말만 통하면 친구… 선(線)을 넘는 사람

최근 공개된 2016년 윤여정 데뷔 50주년 기념 파티 영상은 분야를 뛰어넘는 그의 마당발 인맥을 보여준다. 그중 한 명이 피수영(78) 박사다. 수필가 피천득의 둘째 아들로 국내에서 신생아학을 개척해 미숙아 1만여 명을 살린 명의다. 영상에서 윤여정이 “이분은 아버님이 더 유명하다. 자랑할 게 맨날 그것밖에 없어 큰일”이라고 농담할 만큼 막역하다. 피 박사는 “형(유명 DJ였던 피세영)이 윤여정씨와 인연이 있어 나도 40년 넘게 알고 지냈다. 처음과 지금, 앞과 뒤, 무대 위와 아래가 똑같은 사람”이라며 “정말 스마트하고 호기심이 많아 여러 분야 사람과 친분이 있다”고 했다.

김수철을 포함해 윤여정을 중심으로 뜻 맞는 사람 십여 명이 모인 사모임도 있다. 이름은 ‘지풍년(’지Χ도 풍년'을 줄인 말)’. 영화감독 이재용, 건축가 조민석,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평론가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등이 멤버다. 김수철은 “누나는 선을 긋는 사람이 아니다. 분야를 따지지 않고 말이 통하면 친구가 된다”며 “겉은 까칠해 보이지만 속은 따뜻하고, 사귀는 건 쉽지 않지만 한번 사귀면 오래가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윤여정을 중심으로 만든 모임 ‘지풍년’의 멤버 일부.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배우 강동원,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건축가 조민석, 평론가 이택광, 영화감독 이재용, 윤여정, 가수 김수철. / 가수 김수철 제공

◇싸구려 입어도 멋진 ‘믹스 & 매치’ 달인

‘지풍년’ 멤버인 조민석(55)은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탄 유명 건축가다. 조민석은 서울 평창동에 있는 윤여정 집에 갔다가 모던 디자인의 고전이라고 하는 빈티지 가구와 천경자 그림을 무심히 둔 윤여정의 안목에 놀랐다고 한다. 그는 “윤 선생님은 매구(귀신같이 숨은 보물을 찾아내는 사람)처럼 땅에 묻혀 보이지 않는 보물을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난 분”이라며 “본인은 ‘생계형 엔터테이너’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제가 아는 사람 중 예술적 직감이 아주 뛰어난 사람 중 하나”라고 했다. “가치 있고 중요하다 생각되는 일엔 이득, 위험을 계산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뛰어드세요. 배우로서 중요한 시기마다 독자적 안목과 신념으로 단호하게 예술적 선택을 해왔고요. 그게 ‘순도 높은 격(pure class)’ 아닐까요?”

쎄시봉 시절부터 알고 지낸 가수 김세환(73)은 “‘믹스 앤드 매치' 달인, 자연스러운 멋을 아는 멋쟁이”라고 했다. “1970년대에도 배우들은 명품을 휘둘렀지만, 윤여정은 비싼 옷과 싼 옷을 기가 막히게 섞어 코디했어요. 싸구려도 윤여정이 입으면 비싸 보였죠. 이번에 입은 드레스(마마르 할림)도 유명한 브랜드가 아니라는데 얼마나 심플하면서 고급스러워요. 시상식 무대 뒤 항공 점퍼 차림도 멋있고. 그런 차림을 누가 하겠어요. 윤여정이니까 하지.” 그는 “쎄시봉 멤버 중 누가 패션을 알았겠느냐. 송창식? 조영남? 이장희? 알아보는 사람은 우리 중 나밖에 없었다”며 ‘패션 친구’의 수상을 제 일처럼 기뻐했다.

 

김미리 기자

 

1미리 다른 시선을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