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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컬처 엔지니어링] ‘쿨’하고 ‘힙’하다

최만섭 2021. 4. 29. 05:22

[정진홍의 컬처 엔지니어링] ‘쿨’하고 ‘힙’하다

대본을 성경 읽듯 연기를 일상처럼
식혜 위 밥풀마냥 동동 뜬 인기 말고
스타 아닌 배우로 살던 대로 살련다!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입력 2021.04.29 03:00 | 수정 2021.04.29 03:00

 

 

 

 

 

# ‘쿨’하고 ‘힙’하다! 윤여정을 가리키는 최적의 수식어다. 호리호리하고 가냘픈 여인. 그러나 오스카상을 포함해 영국 아카데미, 미국배우조합상 등 전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총 42관왕을 달성한 위업(?)에 더해 마이크만 잡으면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소감을 빵빵 터뜨리며 거의 모든 매체와 소셜미디어를 평정해버릴 만큼 압도적으로 ‘쿨(cool)’하다. 1947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75세의 할머니. 하지만 한 손에 오스카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거머쥔 채, 우아한 검은색 드레스 위로 카키색 항공 점퍼를 걸치고 아카데미 시상식장을 누비는 모습이 젊은이들조차 감탄할 만큼 ‘힙(hip)’하다. 그 윤여정이 대세다. 하루 이틀 이러다 말 것 같지도 않다. 광고마저 온통 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여전히 까칠한 그가 우리를 이처럼 사로잡는 진짜 이유는 뭘까? 그게 궁금해졌다.

# 하루에 되는 스타하고 배우는 달라요.” 며칠 전 아카데미 수상식이 끝나고 늦은 밤 윤여정이 기자회견 모두(冒頭)에 한 말이다. 이미 스타 중의 스타가 됐음에도 윤여정은 스타이기보다 배우(俳優)이고자 했다. 스타는 반짝한다. 오래가기 어렵다. 하지만 배우는 무명일 때도 있고 유명할 때도 있으며 슬럼프를 겪을 때도 있겠지만 끝내 버티며 스스로의 자존감을 잃지 않는 존재다. 영화 ‘힐빌리의 노래’에서 열연한 동갑내기 배우 글렌 클로스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타길 바랐다고 말할 때 그것이 윤여정의 진심이라고 느낄 수 있었던 이유도 그가 말한 “하루에 되는 스타하고 배우는 달라요”라는 말 때문이었다. 여덟 번이나 오스카상에 노미네이트됐지만 상복은 없던 글렌 클로스다. 급기야 자신에게 밀려(?) 또다시 오스카상을 놓친 그를 향해 진심으로 글렌 클로스가 상 받기를 바랐다고 거듭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윤여정에게 욕심이 있다면 스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배우’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 누구에게나 삶은 일순간의 성공이 아닌 지속적인 성장의 이야기일 때 더 가치 있기 마련이다. 윤여정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연기 철학은 열등의식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연극영화과 출신도 아니고 아르바이트하다가 연기를 하게 됐기 때문에 자신의 약점을 아니까 열심히 대사를 외워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는 게 연기의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결혼과 더불어 연기를 접어야 했다. 그 후 두 아이의 엄마가 돼 요즘 말로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가 됐다. 다시 연기를 하게 된 것은 이혼 후 아이들은 키우며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생계’가 그를 다시 연기의 길로 나아가게 했던 것이다. “저는 절실해서 했거든요. 왜냐하면 정말 먹고살려고 했기 때문에 대본이 저한테는 성경 같았어요.” 그 어떤 말보다도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의 진심과 마주하게 되는지 모른다. 그도 나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인이구나, 살려고 몸부림쳤구나 하고 느끼며 나도 모르게 그에게 스며드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여담이지만 오래전 그는 ‘무릎팍도사’라는 TV 프로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배우는 돈이 급할 때 제일 연기를 잘한다. 예술가도 배가 고프고 돈이 급할 때 좋은 작품을 만든다. 훌륭한 화가들을 봐라. 명작들은 배고플 때 나온다. 그래서 예술이 잔인한 거다.” 정말이지 정곡을 ‘콕’ 찌른 말 아닌가! 사람들은 윤여정의 이런 솔직함을 넘어서 그 매력적인 통찰에 매료되었던 것이리라.

 

# 다시 윤여정의 말이다. “누가 브로드웨이로 가는 길을 물었더니 ‘프랙티스(연습, 실행)’란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 브로드웨이로 가는 지도상의 길이야 표지판을 보면 알 것이지만 정작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배우가 되는 길은 피나는 습관 같은 ‘연습’과 치열한 ‘실행’ 외엔 달리 방도가 없다. 스타는 운에 좌우되지만 배우는 노력에 좌우된다. 그는 그것을 뼛속 깊이 알고 있는 지혜로운 배우다. 일본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이마미치 도모노부(今道友信)는 매주 토요일 밤에 3시간씩 단테의 ‘신곡’ 원전을 주석서 두세 권과 함께 읽으며 노트를 만들어나가는 비밀스러운 습관을 50년 동안 지속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다시 1년 반 동안 15회에 걸쳐 강의를 해서 마침내 ‘단테 신곡 강의'라는 불후의 명작을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윤여정의 반세기 연기 인생이 왠지 이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그는 쉬지 않고 습관처럼 대본을 외우고 일하듯 성실하게 연기했다. 물론 생존하고 생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일상 속 생활력’이야말로 오늘의 윤여정을 만든 것 아닌가 싶다.

#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윤여정은 “(특별한) 계획은 없다. 살던 대로 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옛날부터 결심한 게 있는데, 민폐가 되지 않을 때까지 이 일을 하다가 죽으면 좋을 것 같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탤런트 강부자씨가 윤여정에게 “지금 세상이 온통 네 얘기로 휩싸였다”고 하니까 그는 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언니, 그거 식혜에 동동 뜬 밥풀 같은 인기야.” 그렇다. 윤여정은 ‘식혜에 동동 뜬 밥풀 같은 인기’를 뒤로한 채 미국 NBC 방송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다시 일을 시작할 것’이다. 결국, 우리가 그에게 자신도 모르게 매료되는 속 깊은 까닭은 윤여정이 보여준 그런 어마어마한 행보와 톡톡 튀는 말솜씨 때문이기보다는, 그가 우리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생활인’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러니, “비베 호디에(Vive hodie)!” 오늘을 살아라! 그렇게 산 오늘이 내일을 만들고 그 하루하루가 쌓여 인생을 이룬다. 켜켜이 쌓은 것은 견고하다. 윤여정처럼!

 

정진홍 컬처엔지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