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학자 추기경, 마음 주치의, 할 말 하는 교구장... 정진석 90년 삶

최만섭 2021. 4. 28. 05:07

학자 추기경, 마음 주치의, 할 말 하는 교구장... 정진석 90년 삶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입력 2021.04.28 01:05 | 수정 2021.04.28 01:05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겹게,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조그만 위로가 되는 사람이고 싶다. 우리 국민들에게 밤하늘의 작은 별빛이 되고 싶다.”(2006년 추기경 서임 후 미사 강론에서)

‘혜화동 할아버지’가 하늘의 작은 별로 떠났다.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만남 - 2013년 3월 19일 바티칸에서 교황 즉위 미사가 끝난 직후 정진석(왼쪽) 추기경이 프란치스코 교황과 처음 만나고 있다.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조용한 학자 추기경

27일 선종(善終)한 정진석 추기경은 평소 ‘작은 별빛’을 이야기했다. “왜 ‘큰 위안’ ‘큰 별빛’이 아니고 하필 작은 위안, 작은 별빛이냐”는 질문엔 “송구스러워서”라고 답했다.

정 추기경은 ‘조용한 추기경’이었다. 생활은 검소했다. 수십년 사용한 낡은 가죽가방을 썼고, 이면지를 활용했으며, 웬만한 무더위가 아니면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틀지 않았고, 식사는 거의 구내식당에서 했다. 사제가 되면서 ‘나를 위해서는 최대한 배려하지 말자’고 한 다짐을 지킨 것.

또한 ‘학자 추기경’이었다. 그는 로마 우르바노대학에서 교회법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만 39세에 청주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지 않았다면 학자의 길을 걸었을지 모른다. 그는 1961년 사제품을 받으며 친구와 ‘1년에 한 권씩 책을 내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켜 60권 가까운 저서·번역서를 냈다. ’20세기의 영성가'로 손꼽히는 토머스 머튼(1915~1968)의 대표작 ‘칠층산’을 최초로 국내에 번역·소개한 것도 정 추기경이었다. 지난 연말엔 ‘교회법 해설’ 개정판(전 6권)을 펴냈다.

어린시절 - 1942년 12월 노기남(맨 오른쪽) 대주교 서품식에 복사로 참여한 정진석 어린이(왼쪽 앞줄). /서울대교구

 

◇발명가 꿈꾸던 소년, 마음 고치는 의사로

1931년 서울의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발명가’를 꿈꿨다. 세계 최빈국 수준이었던 나라와 국민을 돕겠다는 꿈이었다. 중앙고를 거쳐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진학했던 그가 사제의 길로 진로를 바꾼 것은 6·25전쟁의 참상을 체험한 것이 계기였다. 발명가가 돼 세계 최빈국이던 한국의 경제발전을 돕고자 했던 그는 세계적 발명품은 언제든 생명을 해치는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목격했다. 스스로도 생사의 고비를 숱하게 넘긴 그는 1954년 대신학교(가톨릭대)에 입학해 1961년 사제가 됐다. 1970년엔 만 39세의 나이로 청주교구장에 임명됐다. 당시 최연소 주교였고, 그 이전까지 청주교구는 미국 메리놀회가 교구장을 맡아왔다. 28년간 ‘청주 사람’으로 살아온 그는 1998년 김수환 추기경 후임으로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돼 서울로 돌아왔다. 청주교구장 시절 그는 ‘음성 꽃동네’ 설립을 지원해 한국형 사회복지의 한 모델을 만들기도 했다.

 

할 말은 하는 교구장, 정의구현사제단 공격받기도

일반적인 정치·사회적 문제엔 ‘조용한 추기경’이었지만 신앙의 원칙과 어긋나는 경우엔 목소리를 높였다.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조작 사건 등 생명윤리 문제나 북한 문제 등에서 그랬다.

 

정 추기경은 대주교 시절이던 2005년 ‘배아줄기세포연구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황우석 박사에 대한 국민적 인기가 대단하던 시절이었다. 반대 이유는 배아줄기세포는 인간 배아 파괴를 전제로 한 연구라는 점이었다. 반대에 그치지 않고 그해에 서울대교구 내에 생명위원회를 만들고 ‘생명의신비상’을 제정했다.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 2006년 2월 22일 추기경 서임 발표 후 서울 명동성당에서 손을 맞잡고 기뻐하는 정진석 추기경(왼쪽)과 김수환 추기경. /이진한 기자

북한 문제에 대해서도 단호했다. 6·25전쟁 60주년이던 2010년 그는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용서의 조건’을 말했다. 그는 “천주교 고해성사에서도 죄의 인정, 잘못했다는 자기반성, 다시는 잘못하지 않겠다는 뉘우침, 공개적 자백 그리고 보상이라는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불의한 공격으로 시작된 6·25전쟁에 관한 소신을 밝힌 것이다. 종교인이라 해서 ‘조건 없는 용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2010년 말에는 ‘4대강 사업 구설’을 겪기도 했다. 당시 간담회에서 정 추기경은 “지난 3월 주교단에서는 4대강 사업이 자연파괴와 난개발의 위험이 보인다고 했지, 반대한다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자 함세웅 신부를 비롯한 정의구현사제단은 “추기경이 주교단 전체의 명시적이고 구체적 결론에 위배되는 해석으로 사회적 혼란과 분열을 일으킨 것은 책임져야 할 문제”라며 집중 공격하기도 했다.

한편 정 추기경은 종교계 재정 투명화에 앞장섰다. 지난 2007년 서울대교구는 전격적으로 재무제표를 주보에 공개했다. 교구 ‘가계부’를 공개한 셈이었다. 이 파장은 전 종교계로 확산해 이제는 종교기관의 재정 공개가 일반화됐다.

 

◇'혜화동 할아버지'로 보낸 말년

정 추기경은 2012년 서울대교구장 직을 염수정 대주교(현 추기경)에게 물려주고 은퇴했다. 은퇴 후 그의 거처는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 주교관. 전임 김수환 추기경이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이곳에서 정 추기경은 사제가 될 때 스스로 다짐한 대로 집필에만 몰두했다. 기도와 집필, 산책과 어린이 등 예방객을 만나는 것이 일과였다. 대외 활동은 발길을 끊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지막 길은 스스로 준비했다. 이미 2018년 연명치료계획서에 ‘연명치료는 하지 않겠다’고 서명했고, 장기 기증과 각막 기증을 서약했다. 입원 후인 지난 2월 25일에는 남은 통장 잔액을 서울대교구가 운영하는 급식시설인 ‘명동밥집’ 등에 써달라고 기증했다.

/김한수 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