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열아홉 살 예진이는 슬픈 과거에 기죽지 않았다… “우리 딸, 많이 컸네!”
[신순규의 월가에서 온 편지]
채권은 만기가 정해져있지만 사람은 자신을 품어야 어른 된다
신순규 시각장애인·BBH 시니어 애널리스트
입력 2021.04.24 03:00 | 수정 2021.04.24 03:00
채권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다 아는 농담이 있다. 사람과 채권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농담이다. 채권에는 만기(mature) 되는 날짜가 명백히 찍혀 있지만, 사람이(특히 남자들이) 철이 드는(mature) 시기는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다. 남자로서 좀 기분이 나쁜 농담이지만, 사람이 철이 드는 때를 알 수 없는 건 사실이다.
법은 나이를 토대로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책임 있는 사회 일원, 즉 어른이 된 것을 인정한다. 예를 들어 뉴저지에서는 만 16세부터 18세까지는 몇 가지 엄격한 제약 아래 운전할 수 있고, 18세가 되어야 결혼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국법은 만 18세가 된 시민에게 선거권을 주고, 21세가 되어야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게 해준다. 술을 싫어하는 나도 스물한 살 되던 날, 학교 친구들과 함께 미도리 칵테일을 마신 기억이 난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법과 상관없는 ‘성숙기’의 시작이 하나 있다. 대학 입학을 앞둔 자녀들이 매년 8월과 9월에 집을 떠나는 것이다. 부모의 보호가 당연했던 둥지를 떠나는 이 일은 매우 중요한 성장의 이정표가 된다. 많은 자녀가 거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상황이 어려울 때 잠깐 집에 들어올 수는 있겠지만, 사람들은 자녀가 대학으로 떠나는 일을 결국 분가로 본다. 그래서 자녀들이 다 대학으로 떠난 집을 ‘빈 둥지'라고 부른다.
/일러스트=안병현
우리 부부도 얼마 전 6년 넘게 품고 있던 ‘새'를 날려 보냈다.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아이, 예진이를. 그런데 떠나보낸 방법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예진이는 우리 집에서 차로 약 7시간 거리에 있는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교에 작년 8월에 입학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차로 대학교가 있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까지 가서 기숙사 방에 짐을 넣어주고, 냉장고나 작은 램프 등 필요한 것을 사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팬데믹 때문에 우리는 예진이를 비행 편으로 혼자 떠나보냈다. 다른 주에서 오는 사람들에 대한 방역 규칙이 아주 엄했기 때문이다.
그 후 우리는 예진이를 찾아갈 기회를 기다렸다. 드디어 3월 말, 아들 데이비드의 봄방학을 맞아 예진이에게 가기로 했다. 예진이가 좋아하는 한국 음식을 차 트렁크에 가득 싣고, 시추 강아지까지 차에 태워서 우리는 모처럼 가족 여행을 떠났다. 예진이 학교 근처에 있는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4박 5일 동안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같이 지낼 예정이었다. 장거리 운전을 도맡아 할 아내를 위해 나는 졸지 않고 재미있는 대화를 이어가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내게 문자가 하나 왔다. 내가 입시를 도와주었던 우리 교회 학생이 케이스 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아이 부모의 부탁으로 토요일마다 전화로 에세이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는데, 그 학생이 예진이처럼 케이스 대학에서 장학금을 포함한 입학 통지를 받은 것이었다. 나도 아내도 많이 기뻐했고, 학생 부모에게 축하 전화를 했다. 미국 대학교 중 랭킹 42위가 되는 학교에 거의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한 것은 축하받을 일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고 난 후, 차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왠지 불편한 침묵이었다. 몇 분 후, 내가 입을 열었다.
“근데 예진이 생각하면 꼭 좋은 건 아닌 것 같지?” 내가 작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신이 무슨 말 하는지 알아.” 아내가 대답했다.
그랬다. 친한 교인의 아들이 케이스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상상하며 나와 아내는 예진이에 대한 걱정을 한 것이었다.
예진이는 야나 유학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에게 오게 된 아이다. 야나(YANA·You Are Not Alone) 미니스트리는 한국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 지인들과 내가 설립한 비영리단체다. 만 2세 때부터 12세 때까지 서울에 있는 동명 아동복지센터에서 성장한 예진이는 야나가 미국으로 초대한 첫 유학생이었고, 우리 가족이 이 귀한 아이의 호스트 패밀리가 되었다.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부터 한 가족이 되는 것까지 세월도 힘도 많이 들었지만, 예진이는 언제부턴가 입양 절차를 밟을 필요도 없을 만큼 가까운 우리 딸, 그리고 데이비드의 누나가 되어 있었다.
이런 배경을 다 아는 교회 친구가 같은 대학교에 갈 거란 소식을 접했을 때, 나와 아내는 같은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언젠가 예진이가 교회를 옮겼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자신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은 교회가 불편해진 모양이었다. 다른 교회에 가면, 자신도 데이비드와 똑같은 엄마 아빠의 아이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그런데 같은 교회의 아이가 케이스 학생이 되면 예진이의 배경이 학교 친구들이나 그곳 교회 사람들에게도 알려질 수 있을 거란 걱정이 들었다.
우리는 쓸데없는 걱정을 자주 한다. 엄마 아빠가 그런 걱정을 했다는 말을 들은 예진이는 오히려 뜻밖의 반응으로 우리를 안심시켰다. 대학 후배가 될 그 친구가 입이 가벼운 아이도 아니고, 설령 어떤 경로로 자신의 배경이 새 친구들이나 새 교회에 알려진다 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예진이는 그 이야기가 사실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창피할 이유는 하나도 없으므로 꼭 감춰야 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마음이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마시고 있는 공기가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고 있었다. 한때 자신의 배경을 숨기려 했던 아이가 어느새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친부모와 같이 살 수 없어서 10년 동안이나 시설에서 생활했던 예진이의 마음 건강에 대한 걱정도 이젠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감이야말로 성숙의 증표이며 마음 건강의 증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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