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진화하는 맞춤의 세계… ‘트렁크 쇼’를 아십니까

최만섭 2020. 12. 28. 05:29

진화하는 맞춤의 세계… ‘트렁크 쇼’를 아십니까

세분화되는 취향, 다양해지는 맞춤

채민기 기자

입력 2020.12.28 03:00

 

 

 

 

 

 

피렌체에서 활동하는 재단사 최호준(오른쪽)씨가 서울의 구두 편집숍 '유니페어'를 방문해 고객의 옷을 가봉하고 있다. 이탈리아까지 가지 않고도 피렌체 스타일의 옷을 경험할 수 있는 맞춤옷 제작 방식이다. /유니페어

직장인 최성운(37)씨는 지난여름에 맞춘 겨울 코트를 요즘 즐겨 입고 있다. 서울에서 주문하고 영국에서 제작한 이 코트는 기성복처럼 치수를 고른 뒤 기장과 소매 길이만 살짝 조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맞춤’이라고 하는 이유는 옷감의 선택지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겉감 150여 종, 몸통 안감 15종, 별도의 소매 안감도 20여 종. 계산해보면 4만5000가지 이상의 색상 조합이 가능하다. 최씨는 “하나씩만 고르기 힘들었지만 나만의 옷이 지어진 것 같아서 입을 때마다 기분이 좋다”고 했다. 이 코트를 주문한 사람 가운데는 심사숙고하느라 옷 한 벌을 맞추면서 사흘 연속 매장에 나온 이도 있었다고 한다.

서울 신사동 구두 편집숍‘유니페어’에서 열린 슈트 트렁크 쇼장에 다양한 옷감 견본이 진열된 모습. 국내는 물론 해외 재단사들을 초청해 맞춤옷을 짓는 트렁크 쇼는 여러 양복점을 일일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재단사들마다 조금씩 다른 스타일을 경험해볼 수 있어 최근 주목받고 있다. /유니페어

메가 트렌드(대유행)가 사라진 시대, 취향은 점점 세분화된다. 이에 맞춰 패션·디자인 분야에서 ‘맞춤’이 진화하고 있다. 맞춤 제작의 방식이 다양해지고 맞춤 가능한 물건의 종류도 늘어난다. 아는 사람들만 찾던 맞춤의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

 

◇구두코 장식까지 취향에 맞게­

패션 분야에서는 기성 제품을 판매하는 매장에서 국내외 재단사나 브랜드를 초청해 개별 주문을 받는 ‘트렁크 쇼’가 자주 열린다. 서울 서촌의 한옥 구두가게 ‘팔러’ 황재환 대표는 “옛날 외판원들이 큰 트렁크에 물건을 채워 들고 다니던 데서 유래한 말”이라고 했다. 통신·물류의 미비에 대응하던 방책이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키는 비결로 재등장한 셈이다. 예컨대 팔러는 미국 구두회사 ‘알든’의 기성품을 판매하지만 트렁크쇼도 연다. 황 대표는 “일반적 사이즈보다 훨씬 크거나 볼이 넓은 제품, 매장에서 팔지 않는 모델을 주문할 수 있다”고 했다.

트렁크 쇼에서 구두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제작 과정을 시연하는 모습(왼쪽). 삼성전자의 ‘비스포크’냉장고는 문 하나하나의 색상을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유니페어·삼성전자

서울 강남의 구두 편집숍 ‘유니페어’도 트렁크 쇼를 자주 여는 매장이다. 강재영 대표는 “브랜드마다 선택의 폭은 조금씩 다르지만 가죽, 밑창, 안감의 종류부터 구두코 구멍 장식의 크기와 모양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구두 가게지만 런던 유명 양복점 ‘앤더슨 앤드 셰퍼드’나 피렌체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재단사 최호준씨를 초청해 슈트 트렁크 쇼도 연다. 올해 피렌체에서 귀국해 서울 명륜동에 양복점을 낸 재단사 김철민씨도 강남의 슈트 편집숍 ‘라마르쉐’에서 이런 방식으로 고객을 만난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외국이나 먼 매장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다양한 스타일의 옷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가전·자전거도 맞춤

'백운자전거공업'에서 제작중인 자전거 프레임(뼈대). 자전거의 사이즈나 파이프 두께 등을 고객이 원하는 대로 설계한다. /백운자전거공업

맞춘다는 개념이 없었던 물건들도 맞춤 제작한다. 일본에서 자전거를 공부한 김영완씨가 작년 11월에 문을 연 ‘백운자전거공업’은 국내에선 아직 일반적이지 않은 자전거 맞춤 공방이다. 자전거도 옷처럼 사이즈가 중요하다. 뼈대가 되는 금속 파이프의 소재나 두께에 따라 승차감도 미묘하게 달라진다. 김영완씨는 “고객과 상담을 거쳐 파이프 종류를 결정하고 신체를 측정해서 도면을 그리고 자전거를 만든다”고 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6월 문 색깔을 취향 따라 고를 수 있는 ‘비스포크’ 냉장고를 선보인 이후 공기청정기·의류관리기 등으로 제품군을 확대하고 있다. 원래 비스포크는 치수를 하나하나 재서 한 사람의 몸에 딱 맞는 옷을 만든다는 뜻. 그만큼 선택지가 풍부하다는 걸 강조한 작명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18일 문 4개짜리와 1개짜리 냉장고를 조합할 경우 최대 199만656가지의 디자인이 나온다는 수치를 공개했다. 채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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