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진상 남편 밀고한 바른생활 아내… 그래도 사랑합니다
[아무튼, 주말]
홍여사
입력 2020.12.19 03:00
“좋아하는 것을 해줄 때보다, 싫어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을 때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 어느 텔레비전 광고에서 흘러나오던 문구입니다. 그 한 문장에 격하게 공감하며, 남편을 흘겨본 아내가 아마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해주던 그 덕분에 내가 한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 행복이 오늘의 두 사람 어깨에 하얀 눈이 되어 내립니다. / 홍여사
별별다방 그림/일러스트= 안병현
“당신이야? 정말 당신이 그런 거야?”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남편이 내게 다짜고짜 묻습니다. 잠시 당황했지만, 그의 손에 들린 제 휴대폰을 보고 대번에 상황을 알아차렸죠. 아니라고 잡아떼기엔 늦었고, 굳이 잡아뗄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들킨 편이 속 시원하달까요?
사건의 발단은 드론이었습니다. 저녁 설거지를 하고 돌아서는데, 남편과 둘째 아들이 쑥덕대고 있더군요. 유난히 죽이 잘 맞는 그 둘이 키득대며 쑥덕댈 때는 뭔가 재미난 일을 꾸미고 있을 때지요. 두 사람은 곧 옷을 입기 시작하더군요. 며칠 전 구매한 미니 드론을 띄워보러 나가겠다는 겁니다. 추운 밤에 어디로 갈 거냐고 했더니, 따뜻하고 밝은 장소를 안다고 남편이 대답하더군요. 설마 하면서도 못 미더워 물었죠.
“지하 주차장 같은 데서 드론 날리려는 건 아니지?”
“한쪽 구석 차 없는 빈 공간에서 할 거야.”
“어머, 주차장은 안 돼. 거기서 드론 날리다 남의 차라도 긁으면 어떡해?”
“날리는 게 아니라 띄우는 거야. 제자리에서 머리 위로 띄웠다 내려놓는 연습만 할 거야.”
“그건 당신 생각이고, 이웃들이 보면 화내지. 주차장에서 드론 띄우는 건 금지 사항이야.”
“누가 보기 전에 얼른 끝내면 되지.”
남편은 언제나 그런 식입니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안전 수칙이나 규정을 곧잘 무시합니다. 조심조심하면 돼, 실제로 피해 주는 건 아닌데 뭐, 이런 말로 저의 경고를 무시하죠. 아직 사고가 안 난 건, 순전히 하늘이 도왔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다툼이 없는 것은 지적을 받으면 얼른 사과하고 바로 물러나는 남편의 무른 성격 때문이고요. 사실 저는 그 점도 싫습니다. 왜 사람이 자존심도 없이 사과할 일을 스스로 만드나요? 타인이 지적하기 전에, 아내 말을 들으면 안 되는 걸까요? 맞습니다. 제가 제일 화가 나는 건 바로 그 점입니다. 남편이 제 말을 깡그리 무시한다는 점. 어떤 말로 설득해도, 남편은 척척 양말을 신고 외투를 입습니다. 그러고 콧노래를 부르며 아이를 데리고 나가지요.
평소 같으면 저는 남편이 아무 일 없이 얼른 돌아오기만 기다렸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엔 저도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랐던가 봅니다. 차라리 성깔 있는 이웃을 만나 된통 망신을 당했으면 싶더군요. 지금 주차장에서 드론 날리는 분들, 당장 그만두시라고 방송이라도 나왔으면…. 그런 생각 끝에 제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짐작이 가실 겁니다. 스스로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야간이라 방송을 할 수는 없었지만, 당직 서시는 한 분을 남편에게 보낼 수는 있었습니다. 민원이 들어왔으니 즉시 중단하라는 말을 남편은 들었겠죠. 이제 막 재미나려던 참이었을 겁니다. 자식 앞에서 제지당했으니 민망하고 당혹스러웠겠죠. 아들은 아마 이런 생각마저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 엄마 말이 맞는구나. 이런 짓은 하면 안 되는 거구나.
십분 만에 코가 쑥 빠져서 집으로 들어오는 남편과 아들을 보며, 저는 통쾌함을 느꼈습니다. 비록 꼼수를 쓰긴 했지만, 내 말이 맞았다는 게 입증되어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그런데 꼼수란 저만 쓰라고 있는 게 아니었나 봅니다. 남편은 저를 의심했고, 몰래 휴대폰을 뒤진 거죠. 딱 그 시간에 관리 사무소에 전화를 건 기록이 있으니….
“와, 진짜…. 가족끼리 밀고를 하네.”
“이웃이 하기 전에 내가 한 것뿐이야.”
“와, 대단하다. 너 이번이 처음 아니지. 지난번에 휴일 오전에는 음악 트는 거 자제해달라고 엘리베이터에 붙은 거, 네가 붙였지? 심야에 안방 욕실 사용 자제하라는 방송도 다 네가 찌른 거고.”
“내가 하기 전에 마침 누가 했더라. 아무도 안 했으면 나라도 했을 거야. 나도 당신 이웃이거든.”
“와 너란 여자 정떨어진다. 가족 맞아?”
남편 반응은 생각보다 격렬했습니다. 제가 이웃들을 이용해 여론전을 펴려 했다면, 남편은 아이들을 끌어들이더군요. 엄마가 아빠를 밀고했다는 자극적 방식으로 말입니다. 열다섯 살 큰아이는 대번 아빠 편을 들고 나섭니다. 친구 간에도 그런 짓을 했다간 손절당한다나요? 한편 신고당한 당사자인 둘째 녀석은 이상한 방식으로 제 편을 들어줍니다. “내 친구 선우도 고자질쟁이인데, 그래도 난 걔가 좋아. 똑똑하고 예쁘고, 항상 맞는 말만 하니까. 걘 자기 자신이라도 잘못을 했을 땐 바로 고자질할 애야.”
애들이 뭐라 하건, 제가 할 말이 없게 되긴 했습니다. 밀고당한 남편의 분노는 제 눈에도 정당해 보였지요. 그렇다면 일단은 사과부터 하고 대화를 해야 하는데, 바로 이런 순간 문제가 되는 게 타고난 ‘성격’입니다. 남편이 잘못을 자주 하고 쉽게 사과하는 성격이라면, 저는 여간해서 흠 잡힐 짓 하지 않는 대신 미안하단 말은 곧 죽어도 못 하는 성격입니다. 배신감 느꼈겠다 싶다가도, 언제부터 남편이 그렇게 나를 믿었나 싶고, 미안하다 말할까 싶다가도, 내가 그에게서 듣지 못한 말들이 본전 생각나듯 생각나 입을 굳게 다물게 되더군요.
그렇게 서먹한 며칠이 삐걱대며 지나갔습니다. 혼자 눈뜬 오늘 아침, 비몽사몽간에 창밖을 내다보고 저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머, 눈이다. 눈이 하얗게 내렸어. 여보, 준이 아빠.”
평소 같으면 왜 왜, 하고 잠결에 대답했을 사람이 오늘은 곁에 없습니다. 아차. 그렇지. 준이 아빠는 단단히 삐쳐서 벌써 며칠째, 소파에서 텔레비전 왕왕 틀어놓고 자고 있지.
조용히 일어나 거실로 나가봤습니다. 소파에서 코를 골고 있을 줄 알았던 남편은 벌써 출근하고 없더군요. 오늘은 특별히 일찍 나가봐야 하는 일이 있었던 걸까요? 요즘 통 대화가 없으니 알 수가 없습니다. 혹시나 싶어 휴대을 열어봤더니 거기엔 남편이 남겨 놓은 메시지가 있더군요.
“눈이 와서 일찍 깼다. 눈 보니 갑자기 생각났어. 우리가 장거리 연애하던 그해 겨울에, 당신이 라디오 방송에 사연을 보냈었지. 언제나 나를 웃게 하는 한 남자가 대전에서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지금쯤 집에 돌아가고 있을 거라고. 그 방송을 나는 하얀 눈 내린 아침 도로를 달리며 들었어. 그때 깨달았어야 해. 당신은 신고 정신이 투철하다는 걸. 어리석긴 당신도 마찬가지야. 방송 듣고 충동적으로 당신에게 달려갔던 나, 졸음에 겨운 눈길 운전을 감행하던 나를 보고 눈치챘어야지. 안전 의식과 준법 정신은 낙제점인 남자라는 걸. 앞으로는 당신에게 뭘 해줄까 고민하는 대신, 당신이 싫어하는 일을 안 하도록 노력할게. 그게 당신이 바라는 거라면….”
이번에도 또 남편이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지켜지지 않을 약속일지언정, 노력하겠다는 말과 함께. 이런 남자를 나는 왜 늘 이기고 싶어 하고, 꼼짝 못 하게 몰아붙이고선 통쾌해할까요?
창밖의 눈은 첫눈답지 않게 펑펑 내립니다. 그 눈을 보며 나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진정 바라는 건 여전히, 나를 보려고 눈길을 달려오는 그 남자라는 걸. 그러나 우린 한 이불을 덮고 살기에, 그럴 수가 없죠. 그럴 수가 없어서, 이러고 사는가 봅니다. 지지고 볶으며, 신고하고 훔쳐보며….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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