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30] 팬데믹의 두 얼굴… 음모론 번져 유혈폭동, 또는 화해의 계기로

최만섭 2020. 12. 15. 05:21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30] 팬데믹의 두 얼굴… 음모론 번져 유혈폭동, 또는 화해의 계기로

질병과 증오

주경철 교수

입력 2020.12.15 03:00

 

 

 

 

 

1892년 8월 6일 르 프티 저널에 실린 삽화 '아스트라한의 폭동'. 당시 러시아 볼가강 하류 지역의 경제·문화 중심지 아스트라한에서는 콜레라로 큰 혼란이 벌어졌다. 콜레라가 극성을 부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콜레라 봉기(Cholera riot)’ 중 하나였다. /게티이미지

2020년은 병으로 시작해서 병으로 끝난 끔찍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마치 온 세상이 몸져누운 것 같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경제는 거의 마비되어 모두 힘겨운 삶을 이어간다. 사회 전체를 불안과 공포 분위기가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이 사태가 더 악화되어 극심한 증오가 판치지 않을까 걱정이다.

 

14세기 유대인 탄압도 페스트가 배경

질병이 폭력을 부른 대표적 사례는 14세기에 유럽에서 페스트가 발병했을 때 일어난 유대인 탄압을 들 수 있다. 1348~1350년 유대인 공동체 1000곳 이상이 공격당해 주민이 몰살당했다. 기독교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가당치 않은 혐의로 남성, 여성, 어린아이 구별 없이 시나고그(유대인 회당)에 가두고 불을 붙여 죽이는 끔찍한 범죄가 일어났다. 감염병 확산이 평소 배척하던 주변 세력을 희생양 삼아 가혹한 폭력을 행사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콜레라가 극성을 부린 시기에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소위 ‘콜레라 봉기(Cholera riot)’는 폭력 양태가 다르다. 병세가 워낙 극심하고 치사율이 높았기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이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대상을 무차별 공격했다. 그런데 페스트 시대와는 달리 이때는 환자들과 서민층이 지배 세력이나 의료계 사람들을 공격했다

 

19세기 말 타슈켄트 사례를 보자. 이 지역에 사는 사르트인(사르트어를 사용하는 이란계 사람)들은 콜레라가 자신들을 독살하려는 러시아 의사들의 음모라고 믿었다. 주민 5000명이 권총과 단도로 무장한 채 러시아인 구역으로 쳐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고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폭력을 가했다. 러시아인 지사는 발로 짓밟고 돌로 쳐서 살해한 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신을 훼손했다. 결국 코사크군이 동원되어 70명을 사살하고 수백 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에야 겨우 진압했다.

 

1911년 이탈리아 칼라브리아 지방의 베르비카로(Verbicaro)에 콜레라가 돌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인구 6000명 가운데 1200명이 시청을 공격했다. 첫 번째 희생자는 얼마 전 인구조사를 담당했던 공무원이다. 농민들은 인구조사가 이탈리아의 인구 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거 대상을 정리하는 일이었다고 믿고 공무원을 총칼, 몽둥이로 공격했다. 폭도들은 시청 건물을 부수고 교도소로 가서 죄수들을 석방했다. 거리에는 콜레라로 죽은 시체가 널려 있었다. 시청으로 복귀하라는 상부 명령에 따라 시내로 돌아간 시장은 끝내 폭도에게 잡혀 살해당했다. 이탈리아 각지에서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흔히 정부가 사람들에게 독을 먹여서 죽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병원에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니 분명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고 믿은 주민들은 불쌍한 희생자를 구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정의감에 불타는 여성들이 특히 맹렬하게 진두지휘했다. 이들이 깃발을 들고 ‘병원으로!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죽음을!’ 하는 구호를 외치면 사람들이 병원으로 진격해 가서 의료인들을 살해한 다음 환자들을 ‘구출’해서 집으로 데려다 주곤 했다.

183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일어난 콜레라 폭동 때 니콜라이 1세가 폭동을 진정시키는 모습. 실제로는 포병대까지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위키피디아

감염병이 화해의 계기였던 로마 시대

콜레라 봉기와 달리 위에서 아래로 증오가 폭발한 사례도 많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 남부에서 천연두(두창)가 기승을 부릴 때가 대표적이다. 백인, 지주, 기업가 등 잘사는 계층이 봉기를 주도하여 원주민(인디언), 이민자들(중국인이나 보헤미아인), 특히 흑인들을 공격했다. 1896년, 멤피스 병원에 입원해 있던 흑인 환자 윌리엄 헤일리를 폭도 20여 명이 공격했다. 몇 달 전에 헤일리의 집에서 처음 천연두가 발병했으니, 말하자면 그가 최초 환자(Patient Zero)라고 믿은 것이다. 그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몽둥이로 맞고 총을 맞아 사망했다. 폭도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고장에서 천연두를 제거하는 가장 신속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감염병 사태는 반드시 폭력 사태를 초래할까?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증오와 불신을 진정시키고 화해를 촉진하는 사례도 없지 않다. 기원전 339년 로마에 괴질이 돌자 당국은 렉티스테르니움(lectisternium)이라는 연회를 개최했다. 음식을 차려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형식이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연회였다. 모든 집이 대문을 열고 지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들어오도록 하여 환대하고, 평소에 원수지간이었던 사람들도 이 시기에는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정부 당국도 죄수들의 수갑을 풀어주었으며, 질병 이후 심각해질 기근 문제에 대비해서 식량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 연회는 그 후에도 감염병이 돌 때 몇 차례 더 개최되었다.

 

기원전 339년 로마에서는 괴질이 돌자 음식을 차려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형식의 연회를 개최했다. 농업의 신을 기리며 향연을 벌였던 로마의 축제 '농신제'를 묘사한 그림./위키피디아

위기 이후 성숙해질 수도 있다

미국에서 황열병과 스페인독감이 퍼졌을 때도 우리 통념과는 반대의 일들이 일어났다. 남북전쟁 직전이던 1853년 뉴올리언스에서 황열병이 발생했다. 당시 남부에서는 지역 간 그리고 인종 간 갈등이 매우 첨예했다. 그런데 흑인들은 자신들이 이 병에 더 강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며 병에 걸린 백인들을 돌보았고 백인들은 흑인들의 용기를 찬미했다. 1918년 텍사스의 엘파소에서 스페인독감이 기승을 부렸다. 이 시기는 멕시코의 혁명가 사파타가 미국 국경 내로 들어와서 미국 국민들을 자극했고, 큐 클럭스 클랜(KKK)이라는 인종차별적 폭력 단체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다. 그런데 백인 중산층 젊은 처녀들이 용기를 내서 독감이 가장 심하게 퍼져 있던 멕시코계 주민 거주 구역으로 들어가 집 청소를 하고 수프를 끓여주는 봉사 활동을 했다.

 

왜 어떤 상황에서는 질병이 격렬한 봉기를 일으키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동정과 상호 이해의 따뜻한 분위기를 만드는 걸까? 아쉽게도 역사가들은 정확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 한다. 치명률(병에 걸린 사람 중 사망하는 사람 비율)이 높을 때 봉기가 심해지는 경향 정도만 확인했을 뿐이다. 다만 상식적으로 이렇게 추론할 수는 있지 않을까? 시민의식이 높은 사회에서는 암만해도 야만적인 폭력 행위가이 덜할 것이고, 정치권이 사회 갈등 완화에 최선을 기울이면 훨씬 순조롭게 위기를 넘길 것이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심각한 위기를 경험한 후 우리 사회가 취약한 측면을 더 보완하며 한층 더 성숙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몸 성할 때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한번 아파 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있게 마련이다. 내년에는 백신과 치료제가 제대로 기능해서 사회 전체가 가뿐하게 병석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빌 게이츠 등 갑부 8명이 코로나 퍼뜨려” 美에도 음모론

팬데믹은 육체뿐 아니라 우리 마음도 병들게 한다. 위기 상황에서 이성적인 사고와 차분한 분석보다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쪽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음모론이 자주 나온다. 코로나19는 빌 게이츠를 비롯한 세계 최고 갑부 8명이 모여 세상에 불필요한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퍼뜨린 병이라는 주장이 그런 사례인데, 놀랍게도 미국에서 이 주장을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제약 회사가 돈을 벌기 위해 일부러 병을 퍼뜨린 후 약을 만들어 판다는 주장도 비슷하다. 과거에도 그런 일은 자주 있었다. 에이즈의 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던 1980년대에 미국 언론들은 아프리카 주민들이 침팬지와 성관계를 맺어서 생긴 병이 에이즈라고 추론했다. 반면 소련 측은 미국의 생물학 무기 관련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병균이 우연히 흘러나왔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음모론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쉽게 설명하는 비법이다.

 

때로는 병명(病名) 자체가 불신과 증오를 나타낸다. 15세기 말 매독이 처음 유럽에 퍼졌을 때, 프랑스에서는 이 병을 ‘나폴리 병(mal de Naples)’이라 부른 반면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 병(malfrancese)’이라 불렀고, 결국 이 마지막 이름이 대세로 굳어졌다. 흔히 이 이야기를 하며 당시 얼마나 무지와 불신이 판쳤는가만 강조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당대 지식인들은 이런 명칭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독일의 인문주의자 울리히 폰 후텐이나 이탈리아의 역사가 프란체스코 귀치아르디니 같은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부르는 실정이니 할 수 없이 ‘프랑스병’이라는 용어를 쓰지만, 이 이름은 전혀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며, 훌륭한 문화를 자랑하는 이웃 나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사과하는 글을 썼다.

 

주경철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