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심리부검'으로 본 세 가지 유형의 극단적 선택, 이를 막으려면…
조선일보
입력 2020.07.18 03:00 | 수정 2020.07.18 05:36
중앙심리부검센터가 알려준 세 가지 위험신호
'부검(剖檢)'은 시체를 해부하고 검사해 사망 원인 등을 규명하는 행위다. 그런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는 직접적 사인보다 왜 그런 결정을 하게 됐는지 살피는 게 더 중요하다.
서울 강남구에는 전국에 하나뿐인 '심리부검센터'가 있다. 보건복지부 위탁기관으로 2014년 문을 연 중앙심리부검센터다. '심리부검(psychological autopsy)'이란 극단적 선택을 한 사망자의 유족을 면담해 심리적 원인을 해부하는 것을 뜻한다.
지난해 말 A씨가 중앙심리부검센터를 찾았다. 그의 30대 아들은 석 달 전 수천만원의 도박 빚을 걱정하다 극단적인 선택으로 사망했다. A씨는 상담실에 들어가 면담운영팀 소속 직원에게 아들의 행적, 아들과 나눈 대화, 자녀와의 관계 등을 말했다. 세 시간 가까이 진행된 면담과 분석 끝에 A씨 아들은 자신이 도박으로 빚을 졌다는 사실을 가족이 알게 된 시점에 극단적인 선택을 결심했다는 점을 파악해 냈다.
현재 중앙심리부검센터에서는 정신보건사회복지사 혹은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자격증을 가진 전문 요원 8명이 심리부검을 하고 있다. 그 부검 자료는 극단적 선택을 예방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한다. 극단적 선택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이면 누구나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지난해에는 사망자 180여명의 유족 200여명이 심리부검에 응했다. 최근 심리부검에서는 세 가지 유형이 나타났다.
①은퇴자: 병 얻으면 더욱 낙담
60대이던 B씨는 35년간 교사로 재직하다가 사망하기 2년 전에 퇴직했다. 아파트 경비원이 되려고 이력서를 내고 면접도 봤다. 하지만 번번이 탈락했다. 그는 가족에게 "이제 나는 쓸모가 없는 것 같다"며 신세 한탄을 했다. 숨지기 6개월 전부터는 불면증과 식욕 저하가 찾아왔다. 말수도 급격히 줄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평소 앓던 당뇨가 악화해, 저혈당으로 인한 쇼크가 세 차례 찾아왔다. B씨는 '우울한데 병까지 악화됐다'는 생각이 들자 극단적 선택을 결심했다.
심리부검 결과에 따르면 적지 않은 은퇴자가 질병을 얻거나 병이 악화하면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한다. 중앙심리부검센터가 2018년 65세 이상 노년 자살 사망자 10명의 유족 등을 상대로 면담한 결과 8명(80%)이 "신체적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답했다. 심리부검센터 유혜림 면담운영팀장은 "구직에 실패해 우울한 와중에 병을 얻으면 '나는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극단적 선택을 결심하는 사례가 많이 발견된다"며 "은퇴자가 병을 얻지 않도록 자신과 가족이 관심을 기울이고 보살피는 게 예방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에 있는 중앙심리부검센터 상담실. 극단적 선택을 한 사망자의 유족이 심리부검을 의뢰하면 정신보건사회복지사 또는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자격증을 가진 전문 요원이 상담을 진행한다. /중앙심리부검센터
②도박: 가족이 아는 순간 위험
강원랜드 등지에서 도박하다 빚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리부검 결과 이들은 대체로 자기 도박빚을 가족이 인지하면 극단적 선택을 결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0대 남성 C씨는 큰 스트레스 없이 회사에 잘 다녔다. 그런데 극단적 선택 2년 전부터 도박에 빠졌고 빚을 수천만원 지게 됐다. C씨는 아내 몰래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고 어머니가 세 차례 빚을 갚아줬다. 다만 '도박으로 빚졌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빚이 사라지자 C씨는 도박에 또 손을 댔다. 숨지기 석 달 전, 다시 5000만원쯤 빚이 생겼다. 그는 더는 어머니에게 손을 벌릴 수가 없다는 생각에 카드사와 저축은행 등으로부터 돈을 빌려 빚 돌려막기를 했다. 갚아야 할 이자가 불어나자, C씨 자택 우편물 함에는 빚 독촉 고지·안내문이 날아들었다. 결국 온 가족이 그의 도박빚을 알게 됐고, 그를 비난했다. C씨는 사흘 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심리부검센터 서지혜 유족지원팀장은 "보통 가족은 마지막 버팀목이라고 생각하는데, C씨처럼 가족으로부터 비난받으면 더는 도움을 받기가 어렵다는 생각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패턴이 나타난다"며 "가족들이 문제를 인지했을 경우 무작정 비난하기보다는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해 해결 방안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③장기간 과음: 극단적 선택 부추겨
심리부검센터가 사망자(103명)의 유족 등을 면담한 결과 85%(88명)가 '생애 전반'에 걸쳐 술을 마신 것으로 나타났다. 짧은 기간에 술 마시는 양이 늘거나 사망 직전 음주량이 줄어들었다고 답한 유족은 10여명에 불과했다.
심리부검에 응한 D씨는 40대 남편과 10년 전 결혼했다. 남편은 결혼 후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직장생활을 했지만 1년 이상 다닌 적이 없고, D씨와 함께 식당을 운영했지만 여섯 달 만에 접었다. 사망하기 2년 전부터는 인테리어 일용직으로도 일했다. 이마저도 술 마시느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사망 석 달 전부터는 일감이 끊겼고, 집에서 술 마시며 밤낮이 바뀐 생활을 했다. D씨는 남편에게 알코올중독 치료를 위한 입원을 권유했지만 남편은 거부했다. 그러자 이혼을 요구했고, 숨지기 한 달 전부터 별거에 들어갔다. 남편은 그 후로도 밤낮으로 술을 마시다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
D씨를 면담한 결과 그의 남편은 오랜 기간 술을 마시는 동안 직장을 잃었고, 인간관계가 망가졌고, 가족까지 등을 돌렸다. 술이 그를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았다는 게 심리부검이 밝혀낸 결과다. 유혜림 팀장은 "오랜 기간 많은 술을 마신 사람이 있다면 이런 위험성을 주의해야 한다"며 "심리부검을 하면 유족이 고인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위로를 받으며 죄책감을 덜 수 있다"고 했다.
극단적 선택을 한 사망자의 유족이라면 누구나 중앙심리부검센터 전화(02-555-1095)로 심리부검을 신청할 수 있다. 비용은 무료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17/202007170256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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