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산모퉁이 돌고 나니] 우주의 주인이 아니라는 깨달음

최만섭 2020. 3. 20. 05:39

[산모퉁이 돌고 나니] 우주의 주인이 아니라는 깨달음

조선일보
  • 이주연 산마루교회 담임목사 

입력 2020.03.20 03:12

이주연 산마루교회 담임목사
이주연 산마루교회 담임목사
산중 인적 끊긴 고요 속에 내리는 봄비는 골짜기를 생기로 가득 채우고, 추녀 끝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추억 속 임의 발자국 소리처럼 반갑기만 하다. 빗소리를 듣던 중 서울에서 이 평창 두메산골 공동체로 내려오던 며칠 전의 일이 떠오른다. 그토록 붐비던 고속철 객실엔 아무도 없었다. 내가 탄 객실엔 오직 나 혼자 앉아 차창 밖 흐르듯 펼쳐지는 초봄의 들과 산을 멀끔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아름다운 봄에 웬 변고인가! 기차를 잘못 탔나? 놀라서 키를 높여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순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떠올랐다. 몇 정거장이 지나서야 뒤쪽 끝 한 자리에 한 승객이 자리했다. 인적이 이렇게 별안간 끊어질 수 있는 것인가! 이 도시와 문명의 시스템이 어찌 일순간 멈추어 선 듯한 것일까!

성경이 일깨워 온 것은 근본 천지와 세상이 사람의 손안에 있지 아니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과 역사도 그러하다고 일깨워 왔다. 우리가 딛고 선 땅도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도 궁극엔 사람의 주권 아래 있지 아니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목숨과 흐르는 시간도 우리의 손으로 더하고 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우주의 주인이 아니라 하는 각성으로 인하여, 욕(欲)의 아집과 그 어둠이 깨져나가고, 마침내 만물의 주인을 향하게 되면서 경이로움과 경외감(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라! 이로써 창조주는 창조주가 되고 피조물은 피조물이 되는 것이라.


[산모퉁이 돌고 나니] 우주의 주인이 아니라는 깨달음
/일러스트=이철원
차창 밖 하늘을 바라보니 지난 주일에 겪은 기막힌 일이 떠올랐다. 나는 예배실이 텅 빈 설교단에서 인터넷 중계로 설교를 하였다. 살아생전 이 나라에서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자 하여도 모이지 못할 일이 생길 줄을 몰랐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를 드리는 일은 성경적 전통에서는 목숨을 내놓을 일이다. 구약시대 안식일 성수는 만일 지키지 않을 시엔 돌로 쳐죽이라는 신성한 절대계명이었다. 주일을 지키는 신약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도 그 정신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신안 앞바다의 증도라는 섬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가난한 이들과 차별받던 여인들의 어머니로 살던 문준경 전도사가 있었다. 그분은 주변에서 만류하였는데도 빨치산 내무서원들이 점령한 섬을 찾아가 교인들을 돌보고 주일을 지킨 후 죽창에 찔리고 몽둥이로 맞고 끝내는 총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이처럼 성경적 전통에서 주일을 지키는 것은 고난을 무릅쓸 신성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교인들에게 교회에서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인적 끊인 텅 빈 기차 안에서 오늘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니 분명하면서도 심정은 복잡하기만 하다. 미물 중 미물인 바이러스에 의해서도 인간 세상은 한순간에 멈추어 서거나 종말을 고할 수도 있을 일일진대, 어찌 창조주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기술과 핵과 권력
을 쥔 인간일지라도 마치 자신들이 우주와 역사의 주인인 양 행세함이 어찌 큰 어리석음이 아니란 말인가! 어려울 때엔 어려운 사람들이 더 어려운 법이다. 주일에 모이지 못하니 매 주일 이른 아침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아침 식사를 나누던 노숙인들과 독거노인들을 어찌하나! 일반 성도들처럼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릴 수도 없고 따뜻하게 식사를 차려 먹을 수도 없으니.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19/202003190682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