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3.20 03:01
[김인중 신부]
화업 60년 맞아 대규모 회고전… 회화 100점·도자 작품까지 선봬
1965년 첫 개인전 출품작도 공개
55년 전 유화 그릴 땐 돈이 없어 모래포대 구해 그 위에 그리기도
어둠은 영원히 어둠이 아닙니다… 관람객에게 희망 선사하고파 코로나 확산에도 고국 찾았죠
성수(聖水)가 처음 몸에 닿은 새벽녘을 그는 잊지 못하고 있다. "하숙집 근처에 성당이 있었다. 신자도 아니면서 매일 새벽마다 나갔다. 미사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55년 전, 군 제대 직후 일자리 찾다 서울 혜화동 소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던 시절이었다. "가난하고 어려운 때였으나 사제가 뿌려 주던 성수를 맞으며 정화되는 기분을 느꼈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모두가 힘겨워한다. 내 그림이 그날의 성수처럼 메마른 사람들을 적셔 줬으면 한다." 김인중(80) 신부가 말했다.
'빛의 화가'로 불리는 김 신부가 10년 만의 국내 개인전 '빛의 꿈'을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4월 4일까지 연다. 1975년부터 프랑스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생활하는 그의 팔순과 화업 60주년을 맞아, 회화 100점에 도자기·스테인드글라스 20점을 선보이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가족들이 함께 전시작을 골라 줬다"고 했다. "바이러스 탓에 한국행을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중세 흑사병 창궐 당시 수많은 성직자들은 기꺼이 아픈 사람들과 함께했다. 하물며 전시회 하나 못 가서 되겠나. 미술과 신앙은 봉헌이다. 오늘도 기도했다. 안이한 생활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망라했다. 첫 개인전 당시 출품했던 1965년 작 '무제'도 공개된다. "돈이 없어 캔버스를 살 수 없었다. 동대문 가서 미군들이 쓰던 모래 포대를 얻어 이은 뒤 그렸다." 그림은 근작의 투명하고 밝은 기운보다 다소 어둡고 거칠어 보인다. "고향에 대한 향수와 당대의 정서적 풍경을 담았다"고 했다. 신부가 되기로 결심한 뒤 외국(스위스)으로 건너가 청과물 시장 등에서 일하며 고학했다. "캔버스와 유화 물감이 너무 비싸 감당이 안 됐다. 그래서 10년 동안 종이에 수채화를 그렸다. 이때 익힌 '번짐'의 효과가 지금 스타일에 큰 영향을 줬다. 그러니 어둠이 영원히 어둠이 아니다."
화폭의 무(無)에서 태어난 색이 수묵처럼 번져 여백의 광휘를 드러내는 그의 그림은 흔히 추상화로 인식되곤 한다. "나는 추상화가가 아니다. 그림 그릴 때 산(山)을 떠올린다. 산이 쉬이 연상되지 않는다면 가상의 새 한 마리를 그려 보라." 김 신부가 손가락을 뻗어 2009년 흑백 작품 '무제' 위에 새 한 마리를 그리자, 추상이 금세 구상으로 현현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솟은 산, 그곳에서 사람은 겸손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산은 신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다. 그 산은 내가 마련하는 것이다. 길을 걷거나 앉은 자리에서도 마음속에 산을 마련할 수 있다. 산은 몸이며 정신이기 때문이다."
김인중 신부의 고도(高度)는 해외에서 더 높다. 올해 봄 아프리카 차드공화국 수도 은자메나(N'Djamena) 노트르담 성당에 스테인드글라스 93점이 설치되고, 6월엔 스위스 생위르잔(Saint-Ursanne) 회화 전시, 12월엔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전시가 예정돼 있다. 다음 달쯤 스페인 화가 피카소와 김 신부의 도자기 작업을 비교한 책 ' 찰흙의 변형'이 프랑스 현지 출간되고, 성서 '시편'을 그의 그림과 병치한 책 역시 국내 출시된다.
매일 새벽 1시에 일어나 기도한다. "캄캄한 시각이지만 내게는 낮보다 밝다"고 했다. "다섯 살 때 해방이 됐는데 당시 배운 노래가 가끔 그림 그릴 때 떠오르곤 한다"며 노랫말을 흥얼거렸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망라했다. 첫 개인전 당시 출품했던 1965년 작 '무제'도 공개된다. "돈이 없어 캔버스를 살 수 없었다. 동대문 가서 미군들이 쓰던 모래 포대를 얻어 이은 뒤 그렸다." 그림은 근작의 투명하고 밝은 기운보다 다소 어둡고 거칠어 보인다. "고향에 대한 향수와 당대의 정서적 풍경을 담았다"고 했다. 신부가 되기로 결심한 뒤 외국(스위스)으로 건너가 청과물 시장 등에서 일하며 고학했다. "캔버스와 유화 물감이 너무 비싸 감당이 안 됐다. 그래서 10년 동안 종이에 수채화를 그렸다. 이때 익힌 '번짐'의 효과가 지금 스타일에 큰 영향을 줬다. 그러니 어둠이 영원히 어둠이 아니다."
화폭의 무(無)에서 태어난 색이 수묵처럼 번져 여백의 광휘를 드러내는 그의 그림은 흔히 추상화로 인식되곤 한다. "나는 추상화가가 아니다. 그림 그릴 때 산(山)을 떠올린다. 산이 쉬이 연상되지 않는다면 가상의 새 한 마리를 그려 보라." 김 신부가 손가락을 뻗어 2009년 흑백 작품 '무제
김인중 신부의 고도(高度)는 해외에서 더 높다. 올해 봄 아프리카 차드공화국 수도 은자메나(N'Djamena) 노트르담 성당에 스테인드글라스 93점이 설치되고, 6월엔 스위스 생위르잔(Saint-Ursanne) 회화 전시, 12월엔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전시가 예정돼 있다. 다음 달쯤 스페인 화가 피카소와 김 신부의 도자기 작업을 비교한 책 '
매일 새벽 1시에 일어나 기도한다. "캄캄한 시각이지만 내게는 낮보다 밝다"고 했다. "다섯 살 때 해방이 됐는데 당시 배운 노래가 가끔 그림 그릴 때 떠오르곤 한다"며 노랫말을 흥얼거렸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