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평화 시위 위해… 대화 건네는 그들
대화 경찰이라니. 경찰인데 임무가 '대화'다. 정확히는 시위대와 대화하는 경찰이다. 시위대를 불법 폭력 행사를 하는 범법자로 다루지 말고 대화로 갈등을 줄이자는 취지에서 나온 개념. 스웨덴 대화 경찰관제(Dialogue Police)를 본떠 만들어졌다. 지난해 8월 15일 서울에서 시범 운영을 시작해 그해 10월부터 전국 집회 현장에 배치됐다. 현재 서울 400여 명을 포함해 전국에서 대화 경찰 1400명이 활동하고 있다.
'빨간 날=집회 있는 날'이 된 요즘, 대화 경찰은 '대목'을 맞았다. 보수·진보 양쪽에서 연일 시위다. 대체 이들과 무슨 대화를 하는 걸까. 지난 26일 '아무튼, 주말'이 대화 경찰을 따라나섰다. 이날 광화문 광장에선 박정희 전 대통령 40주기(週忌) 추도식, 여의도에선 조국 사태와 관련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찬반 맞불 집회가 열렸다.
집회의 지뢰 제거반
오후 4시 서울 여의도공원 인근. 사법적폐청산 범국민 시민연대가 공수처 설치와 검찰 개혁을 요구하는 집회를 시작했다. "설치하라 공수처!"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 쪽으로 군복 입고 빨간 모자를 쓴 70대 남성 한 명이 '공수처 반대! 조국 구속!'이라는 피켓을 들고 다가왔다. 500여m 떨어진 국회의사당 앞에서 자유연대 등 보수 단체가 진행한 집회 참가자로 보였다. 시위대가 불편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바로 그때였다. "선생님 속상하신 거 저도 잘 압니다. 그런데 여기 계시면 다른 분들이 불편해하세요." 어디선가 노란 조끼 입은 대화 경찰이 나타나 웃는 낯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저쪽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니까. 너무 꼴 보기 싫어." 70대 남성은 물러서지 않았다. 십여 분간 설득과 부탁이 이어지자 남성은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1인 시위는 신고 없이 할 수 있어서 불법은 아닙니다. 오늘같이 맞불 집회를 하는 날은 서로 예민하니까 싸움 나지 않게 미리 부탁하죠." 대화 경찰이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이날 여의도에는 대화 경찰 60명이 배치됐다.
'지뢰 제거반' 역할도 한다. 집회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온갖 갈등을 예측하고, 미리 중재해 집회가 평화롭게 진행될 수 있게 한다. 영등포 경찰서 정보관인 이동훈(39) 경사가 이날 처리한 지뢰는 '소음'이었다. "지난주 국회의사당 앞에서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조국 지지 측과 반대 측이 집회를 했는데 소음 경쟁이 어마어마했어요. 신고가 1000건이 넘었어요. 오늘은 경찰 소음 관리 담당자, 집회 관계자와 미리 삼자대면해 소음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대화 경찰에게 예상하지 못한 '특수 임무'도 떨어진다. 술판 저지하기. 요즘 집회는 축제 분위기다. 신이 난 집회 참가자들이 여기저기 술판을 벌인다. 현장의 한 대화 경찰은 "500mL 생수병에 소주를 담아 파는 노점도 있다"며 "공원에서 음주가 금지 사항이기도 하지만, 술에 취하면 집회에서 마찰이 생길 가능성이 커지니 촉각을 곤두세운다"고 했다. 그는 "오늘 제지한 참가자들은 생수병도 아니고 소주병을 까고 있었다"며 어처구니없어했다.
무엇이든 경찰에 물어보세요
같은 날 오전 9시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 박정희 전 대통령의 40주기 추도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박정희가 없으면 대한민국은 없습니다." "맞습니다!" 체감온도 7도 쌀쌀한 날씨에도 500여 명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었다. 이날도 광화문 광장은 '집회 1번지'답게 추도식과 다양한 집회가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광장 구석구석 노란 조끼를 입은 대화 경찰이 배치돼 집회에 문제가 없는지 살폈다.
전날엔 수천 명이 광장에 모여 문재인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밤샘 집회를 열었다. 전날 대화 경찰로 현장에 나왔다는 한 경찰에게 위험 상황은 없었는지 물었다. "같은 색인 보수 단체들이 모인 집회는 사람이 많이 모여도 대화 경찰이 나설 일이 크게 없어요. 여의도처럼 '맞불 집회'가 문제죠." 그는 "연령대가 높을수록 군인과 경찰을 좋아해서 문제가 생겨도 경찰이 나서서 설득하면 잘 이해해준다"고 했다.
집회가 부드럽게 굴러가도록 하는 대화 경찰의 '윤활유' 역할은 가지각색 행사가 열리는 광화문에서 빛을 발한다. 이날 오전 열린 추도식과 정신장애인 축제인 '서울 매드 프라이드' 행사는 장소가 일부 겹쳤다. 대화 경찰은 추도식 주최 측과 3주간 대화해 추도식 무대를 매드 프라이드 행사 장소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조정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매드 프라이드 관계자가 대화 경찰에게 꾸벅 인사하자 현장에 있던 자원봉사자도 다 같이 박수를 보냈다. 대화 경찰은 "환자 생기면 119 부르시라"며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이 근처에 공공 화장실이 어디 있나요?" 행인이 기자와 동행하던 종로경찰서 소속 대화 경찰에게 물었다. "여기 지하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익숙한 듯 답했다. "제일 많이 물어보는 게 화장실 위치입니다. 처음 대화 경찰이 되면 개방 화장실 위치부터 교육받습니다." 그는 "대화 경찰은 대단한 불법 상황을 막는다기보다 화장실 위치나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처럼 집회 참가자가 가장 궁금한 걸 들어주는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일상이 된 집회
경찰청에 따르면, 2018년에는 집회가 6만8315건 열렸다. 2017년 4만3161건에 비해 58% 증가했다. 집회 성향도 다양해졌다. 정치 집회뿐 아니라 노동 집회가 2017년 대비 73%, 젠더 갈등·성소수자 등 사회 분야 집회가 66% 증가했다. 2018년 집회 금지 통고 건수는 12건으로 2017년 118건에 비해 89% 줄었다. 대한민국은 집회 천국이 됐다.
경찰 측은 "대화 경찰이 경찰과 시위대의 간극을 줄이는 순기능을 해 평화 시위가 늘었다"는 입장이다. 현장에서 만난 한 경찰은 "대화 경찰 조끼를 입고 있으면 참가자들이 먼저 다가온다"며 "노동조합처럼 경찰을 멀리하던 단체도 대화 경찰은 내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거부하지 않는다"고 했다. 경찰 측은 "집회·시위가 대폭 증가했음에도 집회 금지 통고와 미신고 집회, 불법 폭력 시위가 감소했다"며 '대화 경찰제' 시행을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하지만 모든 갈등을 뚝딱 해결하는 만능열쇠는 아니다. 지난 18일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회원 19명이 서울 중구 미국 대사관저 담을 넘어 무단 침입했다. 대화 경찰은 그 현장에 없었다. 한 대화 경찰은 "대화 경찰은 마찰을 미리 막는 역할이다. 기습 시위는 이미 불법 상황이라 대화가 아니라 사법 처리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사법 조치할 때 대화 경찰이 표면에 나서게 되면 집회 주최 측과 쌓은 신뢰가 허물어질 수 있다"고 했다. 집회 도중 집단 폭력이 일어나는 상황이면 대화 경찰이 나서도 해결할 수 없다. 국회 앞 집회를 담당하는 영등포 경찰서 소속 대화 경찰은 "집회 참가자들이 대화 경찰을 둘러싸고 '그래, 대화 한번 해보자. 당 대표 만나러 가겠다는데 당신이 뭔데 막느냐'며 욕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대화 경찰까지 필요할 정도로 모든 정치적·사회적 이슈를 '거리'에서 해결하는 현 상황이 비정상이라는 지적도 있다. 대화 경찰관제가 도입되기 전부터 집회 관리를 담당한 한 종로경찰서 경찰관은 "정치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거리로 쏟아진다. 집회 참가자가 경찰을 주먹으로 때리기도 한다. 정치적 대립이 싸움으로 번지지 않고 평화 집회가 될 수 있게 경찰이 온몸으로 막아내는 상황"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