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하필이면 휴게소 커피를… 영화는 불행으로 빠져들었다

최만섭 2019. 11. 2. 08:05

하필이면 휴게소 커피를… 영화는 불행으로 빠져들었다

조선일보
  • 이용재 음식평론가 

입력 2019.11.02 03:00

[아무튼, 주말- 이용재의 필름위의만찬]
12. '화차'와 휴게소 먹거리

맛없는 고속도로 휴게소 커피는 앞으로 일어날 불행을 암시하는 복선이었을까. 선영(김민희 분)은 화장실 가는 문호(이선균 분·사진)에게 커피를 부탁한다. 그리고 문호가 커피를 사오는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영화 캡처
맛없는 고속도로 휴게소 커피는 앞으로 일어날 불행을 암시하는 복선이었을까. 선영(김민희 분)은 화장실 가는 문호(이선균 분·사진)에게 커피를 부탁한다. 그리고 문호가 커피를 사오는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영화 캡처
'이런, 이런. 큰일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화장실에 가는 문호(이선균 분)에게 선영(김민희 분)이 커피를 부탁하자 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휴게소의 먹거리 선택이 다양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렇지, 하필 커피를! 그 이유만으로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의 수렁에 빠져 들었다. 분명히 엄청난 사건이 기다리고 있겠지. 아주 불행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겠지. 설정도 줄거리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보기 시작했건만 나는 굳게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호가 커피를 사오는 사이 선영은 사라져 버린다. 결혼 한 달을 앞두고 청첩장을 찍어 시부모 자리를 찾아가는 고속도로 위에서 사라지다니. 알고 보니 선영은 가족 없이 혼자 사는 또래 여성을 대상으로 자신의 정체를 세탁하는 살인자였다.

역시 그렇구나. 영화의 자막이 올라가며 나는 결말의 찝찝함과 더불어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휴게소 커피야. 마시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음식이지. 영화 속 삶이 방사하는 불우함과 기구함이 찝찝함을 안겨주는 가운데 역시 음식 평론가로서 나의 '촉'이 틀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도감을 느낀 것이다. 다른 음료를 마실 수는 없었을까? 잠 쫓기가 목표였다면 카페인을 섭취하면 되니 콜라라는 좋은 대안이 있다. 무엇을 어떻게 먹고 마시든지 좌우지간 고속도로 휴게소의 커피만 피하면 되는 건데 그게 안 돼 이런 불행이 벌어지다니, 믿을 수 없었다.

탈모는 타이밍, 판시딜!

십 년 전 미국 생활을 접고 돌아와서는 일종의 부채 의식을 느끼며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다. 워낙 바쁘게 맞벌이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 여행을 많이 못 다녀보기도 했고, 딱히 재미를 느끼지도 못해 스물여덟에 떠날 때까지 나는 거의 백지상태였다. 그러다가 만 8년을 외국에서 보내고 돌아오니 그저 궁금해 다니고 싶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고속도로를 달렸는데 가장 먼저 음식에 실망했다. 고국을 떠나 있는 동안 '휴게소 맛집'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무엇이든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가보니 그런 음식이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감자부터 라면이나 찌개까지 대체로 전국 공통 메뉴인 가운데 어차피 경쟁을 하지 않으므로 품질은 그저 그렇다. 이런 음식에 크게 틀어대는 뽕짝까지 맞물려 나는 조금씩 휴게소를 향한 믿음을 잃어갔다.

그렇게 시름시름 시들어 가는 믿음을 한 방에 보내버린 게 바로 휴게소의 커피였다. 오, 이것은 참으로 엄청난 맛없음이군. 영화 속 문호처럼 커피를 사서 단 한 모금을 마시고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털썩 꿇었다. 맛없음에 심연이 있다면 나는 지금 그 눈을 바라보고 있다. 이 커피가 바로 심연의 눈이다. 단 한 모금에 놀라 잠이 확 달아나 버렸으니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는 이뤘지만 이런 과정을 원한 건 아니었다. 망연자실, 나는 한참 동안 운전대를 다시 잡을 생각도 못하고 그 자리에 커피 컵을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물론 맛없는 커피는 맑은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 대학원 시절 '공간 구문론'이라는 전공과목의 교수는 델타항공의 기내 커피를 맛없음의 장대한 축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대체로 비행기 커피는 지나치게 쓰고 진해 마치 한약처럼 맛이 없다. 더군다나 추출 후 식지 말라고 전열기에 서버를 올려놓으니, 시간이 흐르며 향은 날아가는 가운데 조금씩 졸아붙어 더 쓰고 진해진다. 그래서 사실 모든 여객기 커피는 유서가 깊다고 할 정도로 맛이 없는 가운데, 델타항공은 특히 서비스까지 나쁘니 커피 또한 극악이라고 교수는 주장했었다.

안 그런 음식이 있겠느냐만 커피의 맛없음은 과정이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다. 싸고 맛없는 콩(커피 원두)을 맛없게 구워서 온도와 압력도 안 맞추고 대강 내리면 커피는 당연히 맛이 없어진다. 다만 우리 고속도로 휴게소의 커피는 여객기의 그것과 완전한 대척점에 놓여 있다. 싸고 맛없는 콩을 맛없게 구워서 온도와 압력도 안 맞추고 대강 내린 다음 물을 엄청나게 많이 섞는다. 그 탓에 너무 묽어져서 커피인지 보리차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운 가운데 밍밍함을 뚫고 떫은맛과 쓴맛이 혀를 때리고 지나간다. 이런 음식을 돈 받고 팔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이 깨기는 깨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이렇게 맛없는 휴게소 커피의 지위가 요즘은 지역 빵의 부상으로 흔들리고 있다. 천안 호두과자나 경주 황남빵을 필두로 지역 빵의 열풍이 불어닥쳐 안동 하회탈빵, 담양 죽순빵 같은 먹거리가 등장했다. 이 열풍의 한 갈래가 고속도로 휴게소에 자리 잡고 있는데, 많은 경우 잘해보려는 열정이 지나쳐 괴식(怪食)이 되어 버린다. 지역 빵의 조상 격인 호두과자는 모양이 호두를 닮기도 했지만 반죽에도 호두가 들어간다. 호두가 제과제빵에서 흔히 쓰이는 재료이기 때문에 팥소 등과 그럭저럭 어울려 맛을 내는 원리인데, 이를 원래 단맛의 음식과 어울리지 않는 지역 식재료로 대체하면 바로 괴식이 되어 버린다. 오징어나 명태 살이나 가루를 넣은 오징어빵, 명태빵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저 모양만 닮게 만들어도 될 것을, 식재료까지 써 버리는 바람에 상이 엎어지는 격이니 바라보는 음식 평론가는 그저 죽을 맛이다.

맛없음의 심연 같은 커피와 이를 위협하는 괴식 수준의 지역 빵까지 비관적인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하지만 휴게소 먹거리에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열쇠는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지역 농산품 판매소가 쥐고 있다. 명칭에 걸맞게 지역에서 생산되는 식재료는 물론 음식도 종종 저렴한 가격에 판다. 재작년의 가장 맛있는 더덕은 어디인지도 기억 못 할 휴게소의 임시 매대에서 산 것이었으며, 서울양양고속도로의
내린천 휴게소에서는 취를 넣은 찰떡(개별 포장되어 있어 아침 대용으로 좋다)과 황태라면을 사다가 맛있게 먹었다. 경북 영천 휴게소에서는 내륙 생산에 처음으로 성공한 국산 바나나를 판다. 굳이 이런 특산물이 아니더라도 한우나 말린 나물, 과일, 들기름 같은 일상의 식재료도 파니 잘하면 휴게소에서 그날 반찬거리를 모두 구하는 소위 '원스톱 쇼핑'도 가능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01/201911010164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