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2.23 04:00
[삶의 한가운데]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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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바뀌었음을 깨닫는 건 서글픈 일입니다. 새 세상의 주역들이 나의 존재를 거추장스러워한다는 사실 앞에서는 노여움까지 느껴지죠. 그러나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가 그들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 세상으로부터 푸대접을 받는다 해도 그 세상을 아끼고 사랑해주는 것.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노년이겠죠.
홍여사 드림
얼마 전 친구의 시모상에 조문을 다녀왔습니다. 명절을 앞두고 황망했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기도 했습니다. 아흔이 다 되시도록 며느리 손에 수발을 받으시다 돌아가셨으니 감히 '호상'이라 하겠고, 이제는 내 친구도 고달픈 시집살이에서 놓여나겠구나 싶어서 말입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다른 친구들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나 봅니다. 우리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한쪽 방향으로 흘러가더군요. '고부'로 만난 여인들의 질긴 인연, 그리고 각자가 겪었던 매운 시집살이의 기억…. 결론은 언제나 같았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어머니가 되지 말자.
그날 주고받은 대화의 영향일까요? 이번 설에는 며느리를 대하는 제 마음이 한층 조심스럽더군요. 언제 올 거냐 언제 갈 거냐 묻는다든지, 아들 얼굴이 안됐다는 말로 스트레스를 준다든지….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의 목록을 자꾸 마음에 새기게 되더군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질없는 짓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매너를 지켜도 며느리가 명절을 즐거워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요. 저도 한 집안의 며느리인데 왜 모르겠어요. 명절 그 자체가 부담이고 며느리라는 이름 자체가 족쇄라는 것을요.
설날 아침에 며느리와 둘이 차례상을 차리며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늙은 며느리, 너는 어린 며느리, 한 줄 족쇄에 꿰인 인연이로구나. 내가 키운 딸은 남의 집 차례상 차리러 가고 남의 집 딸이 내 부엌에 들어와 있다니. 아들도 분주하게 일을 돕고는 있지만 머리 맞대고 같이 간 보며 접시를 마주 잡는 며느리가 내 마음에는 제일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제 입에서 이런 소리가 저절로 나오더군요.
"얘, 며늘아. 너는 나중에 차례상 이렇게 번거롭게 차리지 마라. 전이며 나물이며 전부 사다가 올려라. 기제사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제 속이 다 후련했습니다. 나는 차마 내려놓지 못하고 여태껏 고생해왔지만 자식한테 그대로 물려줄 수는 없지 싶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째 며느리가 아무 반응이 없네요. 네 어머니, 하고 좋아할 줄 알았는데 농담으로라도 받아주지를 않는 겁니다. 오히려 뜨악해진 며느리의 표정에 아차 싶었습니다. 너희는 아예 제사 같은 것 지낼 필요 없다고 했어야 했나?
언젠가 아들이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저희들 세대는 자식한테 제사상 받을 가능성이 '1'도 없다던가요. 힘주어 뱉는 그 말이 어쩐지 제 귀에는 걸렸습니다. 저희들은 받지 못할 제사상을 조상에게 왜 바쳐야 하느냐는 말로 들려서요.
그때 저는 제사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나 죽고 난 뒤에야 저희들이 제사를 없애든 말든 무슨 상관이랴. 죽은 넋이 젯밥 먹으러 찾아온다고 믿은 적 없고, 제사 잘 모셔야 복 받는다는 소리도 믿지 않은 지 오래이지 않은가. 그저 내 대(代)까지만 내 손으로 제사를 모시자. 그렇게 다짐했었죠. 그래 놓고 무슨 생각으로 며느리에게 당부를 한 셈입니다. 나 죽거든 네가 약식으로나마 제사상을 차려달라고요.
"아니다, 얘. 그것도 일없다. 명절이고 기제사고 다 그만둬라. 사람이 세월을 따라가야지…."
그렇게 중얼중얼 실언을 무마했지요. 그런데 조용히 듣고 있던 며느리가 제 말을 이렇게 받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그런 말씀은 저하고 할 게 아니라 어머니 아들딸하고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는 사실 ○씨 집안 사람도 아니잖아요."
저는 며느리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며느리의 표정을 보고 방금 내가 들은 소리가 농담도 헛소리도 아님을 알았죠. 말문이 막히더라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걸까요? 의외의 반응에 무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건 근본적인 생각의 차이였습니다. 저 역시 ○씨가 아니지만, 저는 저 자신을 평생 ○씨 집안 사람이라 생각하고 살아왔거든요. 며느리 역할이 때론 진저리 나도 남의 일로는 생각할 수 없었죠. 우리 며느리도 저와 비슷한 입장일 거라 생각했기에 안쓰러운 마음이 컸고 그 짐을 최대한 줄여주려 했던 겁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애초에 생각이 다른 듯합니다. 며느리란 아들의 배우자일 뿐, 집안 대소사와는 사실상 무관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모양이고, 제사를 없앤다고 해서 며느리에게 생색낼 일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어쩌면 그 아이는 오래전부터 그런 말을 저에게 하고 싶었던 걸까요? 어설픈 배려보다는 차라리 충분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맞습니다. 저의 배려는 어설펐습니다. 명절에 혼자 차례 준비하고, 차례상 물리자마자 며느리를 친정 보내며, 나는 그 옛날 시어머니들과 다르다고 굳게 믿었지요. 그런데 이제 보니 모든 것은 상대적이네요. 관념이 다른 세대에게는 수준이 다른 배려가 요구되는 모양입니다. 수십 년 며느리로 살며 내가 간절히 바랐던 것을 주어봤자 기본에 불과한 모양입니다. 좋은 시어머니 소리 듣고 싶은 제 마음이 오히려 며느리에게 부담을 줄 뿐…. 그러고 보니 돌아가신 우리 시어머니도 나름은 배려하셨던 건가 싶습니다. 어머니의 기준으로 말입니다.
모든 것은 세대 차이다 생각하니 서운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며늘아이에게 한 가지는 이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내가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를 자꾸 하는 건 영락없는 '시어머니'이기 때문은 아니라고요. 고단한 며느리의 길을 수십 년 뚜벅뚜벅 걸어오다 보니 생각이 틀에 박혀서 그런 것이라고요. 누구나 자기 생각의 벽에 갇혀 살지 않습니까. 그 벽을 깨뜨려 주는 건 대개 아래 세대이고, 그 벽이 깨지는 순간은 아플 수밖에 없지요. 내가 살아온 눈물겨운 세월이 이제 보니 거짓말 같고 허무해서 말입니다.
언젠가는 우리 며늘아이도 그런 기분을 알 날이 있을 겁니다. 그때 가면 한 번쯤 시어머니를 떠올려 주겠지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우리 모두가 걸어가는 길은 결코 다르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홍여사 드림
얼마 전 친구의 시모상에 조문을 다녀왔습니다. 명절을 앞두고 황망했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기도 했습니다. 아흔이 다 되시도록 며느리 손에 수발을 받으시다 돌아가셨으니 감히 '호상'이라 하겠고, 이제는 내 친구도 고달픈 시집살이에서 놓여나겠구나 싶어서 말입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다른 친구들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나 봅니다. 우리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한쪽 방향으로 흘러가더군요. '고부'로 만난 여인들의 질긴 인연, 그리고 각자가 겪었던 매운 시집살이의 기억…. 결론은 언제나 같았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어머니가 되지 말자.
그날 주고받은 대화의 영향일까요? 이번 설에는 며느리를 대하는 제 마음이 한층 조심스럽더군요. 언제 올 거냐 언제 갈 거냐 묻는다든지, 아들 얼굴이 안됐다는 말로 스트레스를 준다든지….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의 목록을 자꾸 마음에 새기게 되더군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질없는 짓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매너를 지켜도 며느리가 명절을 즐거워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요. 저도 한 집안의 며느리인데 왜 모르겠어요. 명절 그 자체가 부담이고 며느리라는 이름 자체가 족쇄라는 것을요.
설날 아침에 며느리와 둘이 차례상을 차리며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늙은 며느리, 너는 어린 며느리, 한 줄 족쇄에 꿰인 인연이로구나. 내가 키운 딸은 남의 집 차례상 차리러 가고 남의 집 딸이 내 부엌에 들어와 있다니. 아들도 분주하게 일을 돕고는 있지만 머리 맞대고 같이 간 보며 접시를 마주 잡는 며느리가 내 마음에는 제일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제 입에서 이런 소리가 저절로 나오더군요.
"얘, 며늘아. 너는 나중에 차례상 이렇게 번거롭게 차리지 마라. 전이며 나물이며 전부 사다가 올려라. 기제사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제 속이 다 후련했습니다. 나는 차마 내려놓지 못하고 여태껏 고생해왔지만 자식한테 그대로 물려줄 수는 없지 싶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째 며느리가 아무 반응이 없네요. 네 어머니, 하고 좋아할 줄 알았는데 농담으로라도 받아주지를 않는 겁니다. 오히려 뜨악해진 며느리의 표정에 아차 싶었습니다. 너희는 아예 제사 같은 것 지낼 필요 없다고 했어야 했나?
언젠가 아들이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저희들 세대는 자식한테 제사상 받을 가능성이 '1'도 없다던가요. 힘주어 뱉는 그 말이 어쩐지 제 귀에는 걸렸습니다. 저희들은 받지 못할 제사상을 조상에게 왜 바쳐야 하느냐는 말로 들려서요.
그때 저는 제사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나 죽고 난 뒤에야 저희들이 제사를 없애든 말든 무슨 상관이랴. 죽은 넋이 젯밥 먹으러 찾아온다고 믿은 적 없고, 제사 잘 모셔야 복 받는다는 소리도 믿지 않은 지 오래이지 않은가. 그저 내 대(代)까지만 내 손으로 제사를 모시자. 그렇게 다짐했었죠. 그래 놓고 무슨 생각으로 며느리에게 당부를 한 셈입니다. 나 죽거든 네가 약식으로나마 제사상을 차려달라고요.
"아니다, 얘. 그것도 일없다. 명절이고 기제사고 다 그만둬라. 사람이 세월을 따라가야지…."
그렇게 중얼중얼 실언을 무마했지요. 그런데 조용히 듣고 있던 며느리가 제 말을 이렇게 받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그런 말씀은 저하고 할 게 아니라 어머니 아들딸하고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는 사실 ○씨 집안 사람도 아니잖아요."
저는 며느리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며느리의 표정을 보고 방금 내가 들은 소리가 농담도 헛소리도 아님을 알았죠. 말문이 막히더라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걸까요? 의외의 반응에 무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건 근본적인 생각의 차이였습니다. 저 역시 ○씨가 아니지만, 저는 저 자신을 평생 ○씨 집안 사람이라 생각하고 살아왔거든요. 며느리 역할이 때론 진저리 나도 남의 일로는 생각할 수 없었죠. 우리 며느리도 저와 비슷한 입장일 거라 생각했기에 안쓰러운 마음이 컸고 그 짐을 최대한 줄여주려 했던 겁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애초에 생각이 다른 듯합니다. 며느리란 아들의 배우자일 뿐, 집안 대소사와는 사실상 무관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모양이고, 제사를 없앤다고 해서 며느리에게 생색낼 일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어쩌면 그 아이는 오래전부터 그런 말을 저에게 하고 싶었던 걸까요? 어설픈 배려보다는 차라리 충분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맞습니다. 저의 배려는 어설펐습니다. 명절에 혼자 차례 준비하고, 차례상 물리자마자 며느리를 친정 보내며, 나는 그 옛날 시어머니들과 다르다고 굳게 믿었지요. 그런데 이제 보니 모든 것은 상대적이네요. 관념이 다른 세대에게는 수준이 다른 배려가 요구되는 모양입니다. 수십 년 며느리로 살며 내가 간절히 바랐던 것을 주어봤자 기본에 불과한 모양입니다. 좋은 시어머니 소리 듣고 싶은 제 마음이 오히려 며느리에게 부담을 줄 뿐…. 그러고 보니 돌아가신 우리 시어머니도 나름은 배려하셨던 건가 싶습니다. 어머니의 기준으로 말입니다.
모든 것은 세대 차이다 생각하니 서운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며늘아이에게 한 가지는 이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내가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를 자꾸 하는 건 영락없는 '시어머니'이기 때문은 아니라고요. 고단한 며느리의 길을 수십 년 뚜벅뚜벅 걸어오다 보니 생각이 틀에 박혀서 그런 것이라고요. 누구나 자기 생각의 벽에 갇혀 살지 않습니까. 그 벽을 깨뜨려 주는 건 대개 아래 세대이고, 그 벽이 깨지는 순간은 아플 수밖에 없지요. 내가 살아온 눈물겨운 세월이 이제 보니 거짓말 같고 허무해서 말입니다.
언젠가는 우리 며늘아이도 그런 기분을 알 날이 있을 겁니다. 그때 가면 한 번쯤 시어머니를 떠올려 주겠지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우리 모두가 걸어가는 길은 결코 다르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