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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의 新줌마병법] '바가지'도 사랑이란 걸 그때는 몰랐네

최만섭 2018. 2. 13. 09:11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바가지'도 사랑이란 걸 그때는 몰랐네

아내 자식 떠나보낸 기러기 1년 차… 자유와 해방감에 날아갈 듯하더니
절간 같은 집에서 '혼밥' 먹다가 마누라 악다구니마저 그리워졌네
우울증에 名藥은 물걸레질과 빨래… 살림 재미 터득하니 心身이 무탈

김윤덕 문화1부장
김윤덕 문화1부장
자유와 해방. 이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요. D데이가 다가올수록 '마누라'란 이름 석 자의 굴레와 억압, 히스테리에서 벗어난다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르더군요. 뭐, 공항에서 잠시 울컥하긴 했습니다. 그 독한 마누라가 눈자위 벌게져서는 "밥 잘 챙겨 먹어" 하며 손 흔드는데, 오~ 이 낯선 당혹감이라니요. 그러나 슬픔도 잠시. 불알친구들과 코가 비뚤어지다 못해 뭉개지도록 술을 마셔도 악다구니할 여자 없다고 생각하니 차 지붕을 뚫고 날아오를 것 같더군요. 거실을 활보하며 알파치노처럼 담배를 피우고, 호박돔 잡으러 갯바위 낚시도 가고요. 마누라와 두 자식 등쌀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뭉크처럼 절규하던 시간이 마침내 종을 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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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입니다. 1년도 못 돼 그 자유란 놈이 저의 뒤통수를 때렸습니다. 토요일 낮 열두 시까지 대자로 뻗어 자도, 퀴퀴한 양말과 담뱃재 뒤엉켜 마룻바닥을 뒹굴어도 벼락 치는 사람 없건만, 기분이 그닥 짜릿하지 않으니 어인 일인가요.

절간 같은 집에서 득도도 할 참인데 기쁨은커녕 고독이 사무치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요.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잔불 하나 없는 컴컴한 집으로 들어설 때입니다. 한번은 실수로 거실 등(燈)을 켜고 출근했더니, 퇴근길 창문으로 불빛이 환합니다. 어찌나 설레던지, 아무도 없는 줄 알면서도 초인종을 두 번이나 눌렀지 뭡니까. 돼지우리 같은 집에 들어서기 싫어 찜질방으로 도망친 적 있다면 믿으실까요? 자유가 무한대로 널린 유토피아가 공포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외로움 따위 문제없다 자신했습니다. 자취 10년 발판으로 족발도 찌고 수육도 삶고 치즈 그라탱도 만들고요. 하지만 딱 한 달 만에 때려치웠지요. 황제의 밥상도 둘이 먹고 셋이 나눠야 즐거운 법. 동네 맛집을 발굴하라고요? 그 또한 고역이더군요. 어느 비 오던 날, 소주 한 병에 삼겹살 시켜 구워 먹는데 사람들 동정 어린 시선이 사방에서 달려들었지요.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바가지'도 사랑이란 걸 그때는 몰랐네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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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왜 보냈냐고요? 한국이 싫어서요. 1등만 하라 가르치는 교육에 넌덜머리 나서요. 내가 1등하고 100점 맞으면 누군가는 꼴찌를 하고 50점을 맞아야 하지 않나요? 성적으로 줄 세우고, 남을 밟고 일어서게 하는 교육이 싫었습니다. 아이들 가 있는 그 나라는 우리는 모두 다르다는 것부터 가르친다더군요. 수학은 못하지만 달리기는 잘하는 아이, 과학은 못하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

성적표에도 무엇을 못한다 대신 이렇게 하면 훨씬 더 잘할 것이라고 적혀 있다지요. 학교에도 서열이 없습니다. 축구 잘하는 학교, 오케스트라 잘하는 학교는 있어도 아이비리그 잘 보내는 학교는 없답니다. 봄이면 마을 전체를 마라톤 하며 뛰놀고, 여름이면 대자연으로 캠프를 떠나고요. 대학 안 가도 행복해질 수 있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 서울서 학원 뺑뺑이에 시달렸던 아이들 두 볼이 웃음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이 저를 다시 소처럼 일하게 합니다.

문제는 우울증. 10년 차 기러기가 두 가지 처방을 일러주더군요. 하나는 여자친구 만들기. 돈과 시간이 남아돌아야 한 대서 바로 포기했습니다. 둘째는 청소입니다. 황당하지요? 뜻밖에 효험이 있더군요. 일주일에 한 번 물걸레질만 해도 집안 공기가 확 달라지는 겁니다. 구석구석 뽀송해지니 밥 짓고 조기 구워 소찬도 즐기고요. 크린토피아에 맡겼던 빨래도 내 손으로 합니다. 와이셔츠 칼같이 다려 차곡차곡 걸다 보면 실타래 같던 머릿속도 가지런해지니 일석이조(一石二鳥). 거실 등 켜고 나오는 일도 없습니다. 전기료가 얼만데요.



빙속 황제 크라머의 질주를 보면서 새 목표도 세웠습니다. 입만 열면 "사내는 역시 갑바야" 노래하는 여자 상사(上司)를 '미투'는 왜 안 잡아가나 했더니, 서른두 살 스케이터의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근육에 남자인 저도 무너지더군요. 낼모레면 쉰. 더 나
이 먹기 전에 내 생애 복근이란 걸 가져보려고 마라톤을 시작했습니다. 여친이 생겼냐고요? 그럴 리가요.

여름 휴가 때 마누라한테 보여주려고요. 마누라는 다 늙어 뜀박질하다 다리라도 부러지면 병원비는 어쩔 거냐 타박하겠지만, 그 지청구 들으며 낮잠 한번 푸지게 자는 게 소원입니다. 상봉까지 D-150일. 잔소리가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요.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12/201802120274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