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Why] 山사나이가 외친다… 내 한손엔 겸손, 다른 손엔 숙명

최만섭 2017. 11. 5. 06:53

[Why] 山사나이가 외친다… 내 한손엔 겸손, 다른 손엔 숙명

[전현석 기자의 觸<촉>] 산악계의 오스카상 '황금피켈상' 한국인 첫 수상자 김창호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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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로 황금피켈상을 받는 김창호 대장이 서울 인왕산에 올라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는 “산에 왜 오르는지 알기 위해 산에 오른다”고 말했다./박상훈 기자
김창호(48)는 생사(生死)를 오가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히말라야 해발 8000m 이상 14좌를 인공 산소 없이 7년 10개월(2005년 7월~2013년 5월) 만에 등정했다. 한국인 최초는 물론이고 세계 최단 기록이다. 14좌 무산소 등정자는 세계 등반 역사상 단 19명이다.

김창호 대장과 최석문(43), 박정용(41) 등 '코리안웨이 강가푸르나 원정대' 3인은 오는 8일(현지 시각)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2017 황금피켈상'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는다. 지난해 10월 네팔 안나푸르나 지역에 있는 강가푸르나(7455m) 남벽에 신(新)루트인 '코리안웨이'를 개척해 정상에 올랐고, 그 직전엔 강가푸르나 서봉(7140m) 남벽에서도 신루트를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 상을 받는 것 역시 한국인 최초다.

1991년 프랑스 고산등반협회와 산악 잡지 몽타뉴가 제정한 황금피켈상은 전 세계 산악인을 대상으로 매년 기술, 혁신, 창의성을 평가해 수여하는 세계 최고의 산악인 상이며, '산악계의 오스카상'이라고 불린다. 한국 산악계가 1962년 히말라야에 첫 출정한 이래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산악상을 수상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7500m 이상에선 산소가 해수면보다 절반 이하이고 기온이 영하 30도 밑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전문 산악인들조차 '죽음의 지대'라고 부른다. 김창호 대장은 그런 곳을 산소 탱크 없이 수십 번 오르고 내렸다. 지난 14일 만난 김 대장은 "강가푸르나 서봉 정상에 오를 수 있었지만 일부러 안 올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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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장이 작년 강가푸르나 정상에 올랐을 때 모습./김창호 제공

'산악계의 오스카상' 한국인 최초 수상

―일부러 안 오르다니요?

"완만한 능선 100m 정도 오르면 정상이었는데 그냥 왔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막내 정용이 컨디션이 나빴거든요. 개척한 루트가 난도가 높다 보니 체력 소모가 컸어요. 가파른 절벽에서 엉덩이 걸터앉을 정도 자리만 겨우 마련해서 쪼그려 앉아 자야 했고요. 원정대 모두 체중이 6~10㎏ 줄었어요."

―2명만 잠깐 올라갔다 오면 되지 않습니까.

"3명이 함께 신루트를 개척했는데, 막내 없이 정상에 잠시 올라갔다 내려오는 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어요? 정상에 있는 순간은 짧지만 내려와서 같이 살아야 할 시간은 굉장히 길어요. 춥고 바람 부는 정상에서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요. 내려오지 않을 거면 올라가지도 말아야죠. 심사위원들도 정상 등반보다 협동심을 더 높게 봤을 거예요. 그리고 안 올라갔으니까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어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 사고가 더 많이 나요. 그리고 함께 올라가서 누군가 혼자 정상을 밟지 못하면, 그 사람이 내려올 때 사고가 날 확률이 매우 큽니다."

―올해는 원정대를 이끌고 인도 다람수라(6446m)와 팝수라(6451m) 봉우리에 신루트를 개척했죠.

"인도는 총 5명이 원정을 떠났는데, 3명은 전국 대학생 대상으로 공개 모집해 선발했어요. 3명 모두 히말라야 등반 경험이 없거나 한 번 등반하다 실패한 게 전부였죠.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대원들과 새 루트로 가야 하니 힘들 수밖에 없었죠. 이러한 불확실성에 도전하는 게 산악인의 숙명 같습니다." 김 대장은 2014년 '원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 원정대장'을 맡아 원정대를 이끌고 9개국 1만5000㎞를 달리기도 했다.

―8000m 이상 등정을 20번 시도해서 17번 정상에 올랐죠. 비결이 있습니까.

"등산은 간단해요. 사람과 산의 만남이에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알고 산을 잘 알면 오를 수 있어요. 등산 장비와 기술은 그다음이죠."

―등반대 대장은 어떤 자리입니까.

"대장에겐 크게 3가지 역할이 있습니다. 오늘 폭풍이 불어도 대원들이 한 걸음 더 가야 하는 비전을 분명히 제시하는 것. 출국해서 되돌아올 때까지 머리 숫자를 맞추는 것. 원정팀 목표뿐 아니라 원정대원 개개인의 목표도 달성하는 것이요."

―어떤 사람이 정상에 오르나요?

"글쎄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잘 모르겠어요."

―의지나 체력이 더 강한 사람?

"히말라야에 도전하는 사람은 모두 의지나 체력이 강한 사람입니다. 별 차이가 없어요. 굳이 대답을 해야 한다면, 자연이, 산이 결정하는 거겠죠. 산을 타다 보면 인간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순간이 와요. 살아남으려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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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호 대장이 히말라야 지도를 보며 등반 루트를 연구하고 있다(왼쪽 사진). 김 대장은 히말라야에 관한 책 5000권을 소장하고 있다. 김 대장이 이끈 코리안웨이 원정대가 2016년 10월 강가푸르나(7455m) 정상을 향해 오르는 모습./김창호 제공

해발 7500m에서 엉엉 울다

김창호 대장은 1969년 경북 예천군 감천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농부였다. 그는 "무역을 하며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어서" 1988년 서울시립대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무역이 아니라 등정 때문에 세계를 누볐네요.

"어느 정도 꿈을 이룬 셈이죠(웃음)."

김 대장은 대학 신입생 때 산악부에 들어가면서 등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가입하고 보니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고 했다.

―어떻게요?

"저는 전국 자연경관 감상하는 줄 알았죠. 웬걸, 처음부터 북한산 인수봉에 가더니 50m 암벽을 오르라는 거예요. 군기도 엄청 셌어요. 정신 바짝 차리라고 그랬겠지만. 쪼그려 뛰기하고 '빠따(몽둥이)'도 맞고요. 토요일에 놀지 못하고 훈련하고. 방학도 없어요.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데 선배들이 그래요. '들어올 땐 마음대로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마음대로 못 나간다.'"

김 대장은 제대 후 24세 때인 1993년 히말라야를 대표하는 암벽 중 하나인 트랑고타워(6283m) 등반에 성공했다. 당시 눈사태로 등반팀 20일치 식량과 장비가 사라졌고 80m 아래로 추락해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지는 최악의 상황에서 정상에 올랐다. 1996년에는 세계 최고 난도로 꼽히는 가셔브룸 4봉(7925m)을 등반했다. 그때 그는 "앞으로 산은 그만 올라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성공적인 등반이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했나요?

"가셔브룸에서 제가 선등을 했어요. 선등자는 후등자를 위해서 암벽이나 얼음 사이에 줄을 연결하는 쐐기를 박으면서 오르는데, 7500m 지점 수직 암벽에서 쐐기를 박을 곳을 못 찾겠더라고요. 탈진 직전의 상태에서 정신도 오락가락하는데, 91학번 후배가 저와 연결된 줄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어요. 그 상태에서 제가 추락하면 우리 둘 다 추락하는 거죠. 발아래 후배에게 '내가 떨어지면 그냥 줄을 놓으라'고 소리쳤어요. 후배는 '그럴 수 없다'며 엉엉 울었어요. 저는 화 내면서 '울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다행히도 제가 목표 지점까지 올라가서 별일은 없었지만, 후배는 귀국 후 '이렇게까지 산에 오르는 걸 이해할 수 없다'며 산악부를 탈퇴했어요. 그때 저 자신에게 물었어요.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4년 만에 다시 히말라야로

김 대장은 가셔브룸에서 돌아온 뒤 등반을 중단하고 1998년 선후배와 함께 아웃도어용품 유통 회사를 차렸다. "IMF 직후였지만 장사가 잘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2000년 다시 히말라야로 떠났다. 등정이 아닌 탐사가 목적이었다.

"회사 차리고 1년쯤 지나니까 히말라야 생각이 모락모락 나요. 사무실에서 늦게까지 일하고 소주 한 잔 마신 날에는 히말라야 사진을 봐야 잠이 왔어요. 그럴 때마다 '돈 좀 벌고 여유 생기면 등반하면 되지' 생각했죠.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10년, 20년 후에 호주머니 사정 괜찮아졌을 때 과연 내가 가고 싶어할까.' 그래서 당장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죠."

―왜 등정 대신 탐사를 하기로 했습니까.

"산에 대해 몰랐으니까요. 그때 우리 지도에는 히말라야의 봉우리가 다 등재돼 있지 않았어요. 외국 지도도 정확하지 않았고. 출발 1년 전부터 집에 처박혀서 자료 모으고 공부를 했어요. 탐험사와 등반사도 다시 읽고, 히말라야에서 사용되는 언어들도 외우고요."

'사람은 누구나 때로는 아프다. 그러나 홀로 있을 때 앓는 者는 진정한 Himalaya Wonderer(히말라야 탐험가)가 될 수 없다.'(2003년 김창호 일기 중)

―팀을 구성하지 않고 혼자 탐사를 다녔죠.

"단체로 움직였다면 10년 넘게 걸렸을 거예요. 예산 문제도 있었고요. 2~3일 가야 하는 거리를 하루에 걷는 게 목표였죠. 그렇게 2000년부터 2006년까지 탐사했습니다. 매년 봄 출국해서 탐사를 마치고 겨울에 귀국했어요."

―의식주 해결이 만만치 않았겠네요.

"처음에는 배낭 무게가 30㎏이 넘었어요. 한 달 돌고 나서 현지 마을에 돌아와 픽 쓰러졌죠. 몸무게가 20㎏ 빠지더군요. 앞으로 나아가려면 버려야 했어요. 입고 있는 옷 말고 여분의 옷을 모두 빼고 식량도 최소화했어요."

―외로웠겠군요.

"처음에는 카메라나 텐트하고 대화도 했어요. '고장 나면 안 돼' 이렇게요. 시간 지나고 나니까 고독도 사치였어요. 탐사에 성공해야 한다는 목표가 생기니까 의식주가 심플해져요. 보통 새벽 4·5시쯤 일어나서 식사하고 짐 정리해서 바로 길을 떠나죠. 해 떨어지면 텐트 치고 밥 먹은 다음 오늘 탐사한 거 정리하고 내일 탐사 일정 짜요. 밤 10시쯤 자고 다시 새벽에 일어났죠."

―아팠을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래도 걸었습니다. 저는 같은 자리에서 두 번 잠든 적이 없었어요. 아무리 눈보라가 몰아쳐도 짐 싸서 한 시간 동안 100m라도 걷고 다시 짐 풀었어요. 어느 날은 어금니에 힘을 꽉 주다가 너덜너덜하게 헐었던 볼살이 씹혔어요. 비릿한 피가 확 나면서 눈물이 핑 돌았는데 몇 번 빨아먹으니까 갈증이 풀려요. 그렇게 걸었어요."

―혼자서 두렵기도 했겠군요.

"수천길 낭떠러지나 야생동물은 두렵지 않았어요. 정말 무서운 건 사람이었어요."

김 대장은 2004년 파키스탄 바투라 2봉 탐사 당시 총 든 괴한 3명에게 결박당하기도 했다. 마을에서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 온 탈레반 일당이었다. 이들은 총알 3발로 위협 사격을 한 뒤 그를 놔두고 떠났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다시 탐사에 나섰죠.

"사실 제일 두려운 순간은 매년 탐사 마치고 귀국할 때였어요. 배낭 하나 들고 다 떨어진 옷 입고 공항 입국장을 나서죠. 다른 사람들은 제 갈 길 찾아서 바삐 움직이는데 저만 혼자 길을 잃은 느낌이었어요. 그때마다 느꼈어요. 제 길은 산에 있다는 걸요."

왜 오르는지 알기 위해 산에 오른다

김 대장은 2013년 5월 에베레스트(8848m)를 무산소 등정했다. 국내 산악인 최초로 인공 산소 없이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모두 오르는 순간이었다. 당시 김창호 원정대는 'From 0 to 8848' 목표로, 해수면 기준 0m인 인도 벵골만에서부터 카약(156㎞), 자전거(893㎞), 도보(162㎞)로 베이스캠프까지 이동해 8848m 정상에 올랐다. 보통 항공기 타고 베이스캠프 부근까지 이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 대장은 "산과 공정한 게임을 하기 위해서" 이 같은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하산 과정에서 함께 등정했던 서성호 대원이 숨을 거뒀다. 정상에서 내려온 직후 캠프(8000m)에서 인공 산소 없이 잠을 자다 호흡이 멈췄다고 한다.

―고산 증세 때문이었나요?

"해발 8400m까지는 인공 산소 없이 시도할 수 있는 높이예요. 히말라야에 8400m 이상만 5개 봉우리가 있는데 여기 등반할 때는 인공 산소 사용 여부를 반드시 기록합니다. 산소가 해발 0m 3분의 1밖에 안 되는 지역이라서 정말 힘들죠. 공기에서 가스 냄새가 납니다. 정상 부근에선 1분에 한 걸음 떼기도 힘듭니다. 정신이 멍해지고 어떻게 등정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때 서성호 대원이 힘들어해서 산소를 권했지만 거부했다면서요.

"수천, 수만 번 생각해 봤어요. 강제로 산소마스크를 씌웠다면 죽지 않았을 거라고요. 하지만 서 대원이 우리 팀에 합류한 이유가 '무산소 등정'이었어요. 그래서 산소마스크를 거부한 거죠. 그도 8000m 이상 봉우리를 12개 등정했고, 이미 2006년에 인공 산소 쓰고 에베레스트도 올랐어요. 또 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팀원 의사에 반해 산소마스크를 씌우지 않을 것 같아요. 그게 산악인이 산에 가는 원칙을 지켜주는 거겠죠. 물론 저는 대장으로 자격이 없을지도 몰라요. 'From 0 to 8848' 이전에 'From Home to Home(집에서 집까지)'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고산 등정에 대한 시각이 예전만 못한 것 같습니다. 등정 시비가 일기도 했죠.

"어떻게든 정상만 오르면 인정해 주는 시대가 있었죠. 그러다 보니 원정대를 대규모로 꾸리고 짐 나르는 셰르파를 많이 고용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 과정에서 세상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사람도 나왔어요.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산은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는 2012년 뒤늦은 결혼을 했고 작년 9월 딸을 낳았다. 딸이 태어난 지 6일 만에 코리안웨이 원정길에 올랐다.

―가족 생각하면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데요.

"가족을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산악인일지도 몰라요. 산악인은 항상 곁에 있는 존재의 소중함을 잘 알거든요. 숨 쉴 수 있는 공기, 누워 잘 수 있는 침대, 매끼 먹는 음식의 고마움을 잘 알죠. 집에 돌아왔을 때 반갑게 맞아주는 식구도 그렇고요. 생과 사가 순간에 정해지고, 죽음 근처에 가봤기 때문에 하루하루 더 충실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된 질문이지만… 왜 산에 오릅니까.

"우리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세요. '내려올 걸 왜 올라가.' 그 답을 저도 아직 못 찾았어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경지에 오른 사람일 거예요.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오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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