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동서남북] 'Me too' 열풍보다 감동적인 것

최만섭 2017. 11. 3. 06:51

[동서남북] 'Me too' 열풍보다 감동적인 것

성추행 폭로 '미투' 캠페인… 일상에 퍼진 성범죄 보여줘
인도·호주 남성들이 시작한 '내가 그랬다' 自省에 감동

김윤덕 문화부 차장
김윤덕 문화부 차장
중학교 영어 선생님은 이제 막 가슴이 봉긋 솟기 시작한 제자들과 '스킨십' 하길 좋아했다. "시험 잘 봐!" 격려할 땐 하필 등짝의 브래지어끈 달린 곳을 쓰다듬었고, 성적보다 아이들의 허벅지 굵기를 더 염려했다. 20대 사회 초년병 시절엔 악수할 때 가운뎃손가락으로 손바닥 긁는 '아저씨들' 때문에 짜증이 났다. 대기업 들어간 친구는 귓가에 콧바람 뿜으며 "내가 총각이라면 너에게 청혼했을 거야" 느물대는 부장 탓에 노이로제에 걸렸다.

성희롱·성추행이란 개념이 없던 90년대 후반, 이 또한 여자의 숙명이거니 하고 살았던 우리 세대에게 할리우드발(發) '미투(#Metoo)' 캠페인은 충격과 통쾌 그 자체다. 이달 초 뉴욕타임스가 거물급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30년 걸친 성추행을 보도한 것이 불을 댕겼다. '나도 당했다(me too)'는 뜻의 폭로 릴레이가 할리우드를 넘더니 미국 체육계, 프랑스 정치계, 네덜란드 과학계에 이어 세계 최고 양성 평등 국가로 불리는 스웨덴으로까지 번졌다.

캠페인의 파괴력은 그 어마어마한 숫자에 있다. 이미 1200만명 여성이 동참했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어도 여성 스스로 "나도 당했다" 털어놓기란 웬만한 용기 없인 불가능하다. 숫자의 힘은, 성범죄가 우리 일상에 얼마나 비일비재한지, 말단 직원부터 톱스타, 지식인까지 얼마나 폭넓게 이뤄지는지 보여준다.

세상 모든 남자가 잠재적 성범죄자라고 주장하는 건 결코 아니다. 인공지능(AI) 활보하는 시대에 우리는 왜 여전히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범죄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의아해서다.

1차 원인은 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무지의 대물림에 있다. 성매매방지법 제정을 격렬히 반대했던 일부 남성들 주장대로 '성욕은 참을 수 없는 것'이란 억지가 대표적이다. 성폭력 가해자 상담을 해온 여성학자 정희진은 "왜 성폭력을 했느냐 물으면 많은 가해자가 '길 가다 소변이 마려운데 참을 수 있나요?'라고 반문한다"고 했다. 과연 그런가? 성욕은 참을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권을 유린한 일본군 만행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여자의 성(性)이 남자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착각도 성범죄를 부른다. 짧은 치마 입은 여자는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고, 웃음 많은 여자는 헤프다는 착각들. 권력욕 강한 일부 엘리트일수록 그 착각은 심해진다. 부하 여직원을 향해 "나는 너의 가슴도 만질 수 있다"고 했다는 감사원 국장의 오만은 우연일까. '비키니 가슴 시위'를 독려하고 "숏팬츠 안에 쫄쫄이 속옷 입지 말라"는 마초들이 최고 권력 주위에 득시글하다.

대다수 선량한 남성은 억울하겠지만 갈수록 잔혹해지는 성범죄의 고리를 끊을 주역은 남성 자신이다. 미투 캠페인이 보여주듯 성범죄란 이영학, 조두순 같은 몇몇 사이코패스들만의 엽기 행각이 아니다. 사회 저변에 흐르는 여성 비하 문화와 차별 구조가 재생산하는 것이다. 여성을 남성 욕망의 분출 용기로 여기는 '따먹다' '눈요기하다' 같은 언어들, 가학의 포르노들이 버젓이 유통되는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이 자란다.

인도와 호주에서 시작된 남성들의 '내가 그랬다(#IDidThat)', '어떻게 바꿀 것인가(HowIWillChange)' 캠페인은 그래서 감동적이다. 호주 작가 벤저민 로는 "이제 우리 차례다. 우리가 어떻게 변해야 할지, 성범죄를 어떻게 줄일지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했다. 배 우 마크 러팔로도 "더 이상 '캣콜링(길거리 성희롱)'을 하지 않겠다"며 동참했다.

'미투' 열풍이 성범죄 신고율 1.9%에 불과한 한국에도 상륙할지는 미지수다. 남성 캠페인은 더욱 요원하다. 설령 용기 있는 몇이 앞장선다 해도 성평등 의식에 관한 한 탈레반 못지않은 인터넷 좀비들이 몰려와 온갖 욕설로 초토화할 테니. 바다 건너 저들의 자성(自省)이 부럽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02/2017110203488.html